본문 바로가기
책(book)/창비시선

《흑발 소녀의 누드 속에는》 김윤이, 창비시선 328

by Sisnaajinii(씨스나지니) 2024. 4. 16.
728x90
반응형

어른의 맛

 

결코 경험만이 아니고 아니고요

그걸 그냥 연애라 말할까봐요

1.5볼트짜리 건전지.

양극 바로 옆에 음극이네요.

시가지 걷다 시그널 음악 멎었을 때

한 걸음 반에서 한사코 숙여 발끝 보던

내게서 가장 먼 날 환히 상상할 수 있어요.

 

키스처럼 혀끝 대봐요.

찌릿찌릿하고 야릇한 씁씁한 맛

전류가 남았는지 알 수 있다네요.

그렇게 내가 흘러온 방향과 흘러가는 방향을 아는 거래요.

하지만 별로 권하진 말아요.

불 켤 수 있는 남은 양 알면

예기치 않게 놀랄 수 있겠네요.

기묘한 동작으로 형언키 어려운 청춘의 불빛들

충전할 수 없는,

날들은 눈부신 거죠

 

시침 땐 표정으로 눈 감아도 느껴지는 이상한 맛

몸뚱어리에 퍼지고 비로소 어른이 되어버렸죠

사랑이렀나요? 우리

아둔한 질문에 쓴웃음 지으며

몸만 남아 수명이 다할 때까지

싱겁게 사라지는, 진짜로 그런 이상한 세월의 맛

 

사거리 신호에 걸린 채

즐비하게 몸 쉬는 여름과 가을 가로수

기억이 방전되도록

들리지 않는 음악 들으며

자연스럽게 어깨 비켜 지나는 연인들

 

  1.5볼트 건전지가 수명을 다해 불이 들어오지 않을 때, 그걸 꺼내 혀에 대면 찌릿찌릿 짭짤한 맛이 느껴지면서 달콤한 여운이 남지요..  그 맛에 이끌려 몇 번이고 다시 연결하면 불이 다시 들어 오곤 했어요. 그렇게 양극과 음극, 흘러온 방향과 흘러가는 방향을 알아갈 수 있을까요? 그 짭짤하면서도 달콤한 맛에 빠져 자연스럽게 어깨 비켜 지나가는  어린 연인들.그 찌릿찌릿한 양극과 음극처럼 스쳐 지나 갈텐데 말입니다.

  어릴 적, 지하실로 내려가 백열등을 교체하라고 해서 전구를 들고 갔답니다. 끊어진 필라멘트의 전구를 교체하려다가, 도대체 전기 맛이 어떨지 궁금증이 일어났지요. 그래서 새 전구를 꽂기 전애, 호기심에 이끌려 손으 백열등 소켓에 넣어보았지요. 뭐라고 하기도 전에 온 몸이 찌릿하면서 순간 강하게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러고는 찌릿하면서 밀려나오고, 다시 찌릿  빨려 들어가더군요. 그 순간 죽었다고 생각 했지요. 그 순간, 무조건 손을 빼야한다고 생각할 때 , 다시 찌릿 하면서 빠져나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젓 먹던 힘까지 발휘해서 손을 쭉 빼내었지요. 음과 양, 양과 음, 순간 죽음을 느꼈는데, 1.5볼트의 찌릿찌릿 하고 야릇한 씁쓸한 맛만, 그 씁쓸한 사랑까지만 하십시요.

 

 

동티 나는 마음

 

  누이야, 숨바꼭질, 발뒤꿈차 보인다야,

  이제쯤 숨었나 치마쪽에 담아온 알싸한 개복숭아 신맛에

옴 돋는 산 문둥이 되었나

 

    동티 무서운 줄 모르는 년이다. 도화로 발가벗겨 쳐내는

어매야 꽃 핀다 귀신 들린 꽃이 부스럼으로 핀다 망태 짊어

진 산지기는 보얀  이내로 팔십을 살고 만장 나부끼지 않았나

 

  저녁답 휘어지는 쌀보리 입안에서 이냥 굴리면 쥐새끼마

냥 쌀을 훔쳐먹고 배곯고 살 팔자다.

  어매야 하지 마라 밤새 뒤주를 쏠던 쥐, 닭의 항문에서 따

뜻한 내장을 꺼내 먹었우니 어매야 누이도 배부르게 살 거다

 

  풋살구 같은 요의 붙잡고 동트길 기다리면 공회당의 종

은 매진 울음 매어단다 쥐오줌 지린 누런 홑청 누이는 손빨

래로 천장 휘날리나

  떠나고 싶은 만큼 ---훠어이 너는 부디 목숨값 하그라

 

  마을 초입부터 피어난 민들레, 눈물의 왕 누이는 서천 꽃

밭 노란 왕관 둘러썼네 멀미 난다 어매야 성내지 마라

  밭일에 노란 밤 배어든 등짝 너머 상두꾼 곡소리 들려온

다야

  우리는 삽짝문 밤 구경 가지 못하고 누이와의 숨바꼭질

은 왜 칭칭하게 불러질까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초경 치른 누이, 장독 뒤에 숨어야 발뒤꿈치 보인다야 어

매 발처럼 크기도 하누나 멧밥 묵고 가듯이

  꼬오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누이야 발뒤꿈치 보인다 꼬오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왜 누이는 숨어야만 할까요. 어떤 숨바꼭질을 하기에 초경 치른 누이는, 개복숭아 신맛, 풋살구 같은 요의, 마을 초입부터 피어난 민들레, 노란 왕관 둘러쓰고, 멧밥 먹고 가듯이 꼬오꼭 숨어야 할까요?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꼬옥꼭 숨어야 할까요?

 

  아기가 젓무덤 빨면 개울 치고

  시간의 빠르기로 풀려나오는 봄

  나울나울 한 시절의 걸음 뗐네 동생 이랑 나비 앞장세웠네

  울음으로 반짝이는 생니, 쑥 주워올렸네

  오, 빨아다오 누가 세월의 빠르기를

 

세월의 빠르기를 어쩌겠어요, 그 한가운데 들어가 흐르는 세월을 즐길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