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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book)/창비시선

《하얀 사슴 연못》 황유원, 창비시선 493

by Sisnaajinii(씨스나지니) 2024.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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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행 눈사람

 

눈사람 인구는 급감한 지 오래인데

밖에서 뛰놀던 그 많던 아이들도

급감한 건 마찬가지

눈사람에서 사람을 빼면 그냥

눈만 남고

그래서 얼마 전 눈이 왔을 때

집 앞 동네 놀이터

이제는 흙이 하나도 없는 이상한 동네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만들어놓은 눈사람을 봤을 때

그건 이상하게 감동적이었고

그러나 그 눈사람은

예전에 알던 눈사람과는 조금 다르게 생긴

거의 기를 쓰고 눈사람이 되어보려는 눈덩이에 가까웠고

떨어져 나간 사람을 다시 불러 모아보려는 새하얀 외침에 가까웠고

그건 퇴화한 눈사람이었고

눈사람으로서는 신인류 비슷한 것이었고

눈사람은 이제 잊혀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였다

눈사람에서 사람을 빼고 남은 눈이

녹고 있는 놀이터

사람이 없어질 거란 생각보다

사람이 없으면 눈사람도 없을 거란 생각이

놀이터를 더욱 적막하게 만들지만

한가지 확실한 사실은

눈사람은 아무 미련 없다는 거

눈사람은 녹아가면서도

자신을 만들어준 사람의 기억을 품고 있고

이번 생은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고

어쩌면 그런 생각만이 영영 무구하다는 거

사람이 천국에 가는 게 아니라

눈과 사람의 합산

오직 사람이 만들어낸 눈사람만이

천국에 간다는 거

 

* 언덕 위 작은 집에 살던 소년이 있었습니다. 겨울이면 집 앞이 눈으로 가득 차곤 했답니다. 어느 날, 소년은 자신의 몸보다 훨씬 큰 눈덩이를 언덕 아래로 굴려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큰 눈덩이가 손년을 감아서 함께 둥글게 구르고 말았답니다. 마치 소년이 눈덩이와 하나가 되어 큰 하얀 덩어리처럼 보였답니다. 눈덩이 아래 깔렸던 소년은 다시 일어섰답니다. 그 큰 눈덩이를 포기하지 않고, 다시 눈사람을 만들기로 마음 먹었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눈덩어이 말려 빙그르 굴러 내려가, 다시 눈덩어리 아래 깔리고 말았습니다. 놀란 사슴처럼 주변을 두리번 두리번거리며 누가 이 모습을 보고 있는지 살폈답니다. 아무도 없어어요. 결국 소년은 발개진 얼굴로 그 눈덩이를 포기하고 언덕 아래로 내려와 새로운 눈을 모아 굴리기 시작했습니다. 소년보다 더 큰 눈덩어리, 그리고 그 보다 조금 작은 두 번째 눈덩어리를 큰 눈덩어리 위에 올렸습니다. 눈, 코, 팔도 만들어주며 멋진 눈사람을 완성했답니다.

 

국민학교 3학년 그 해 그 겨울 제 이야기랍니다. 역촌동 그 언덕, 안녕.....

 

* 황유원 시인의 <하얀 사슴 연못>에 '눈', '겨울', '추위' 등의 낱말이 자주 눈에 많이 띈답니다. 이 시집이 23년 입동이 지난 뒤에 세상에 나와서 일까요? 절의 종소리보다는 조금 가벼울듯한 종소리와 여러 소리들, 그리고 이 소리들이 만들어 내는노래.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무엇인가 노치지 않는, 그리고 강렬한 그 무엇.....

 

 

언중유골

 

말에도 뼈가 있다

뼈까지 가보려면

살을 모두 발라내야 하고

살을 모두 발라내면 환하고

단단하게 빛나고 있는

말의 뼈가 드러난다

말의 뼈는 좀처럼 잘 드러나지 않고

보통 말에는 뼈가 없어

흐물흐물한 문어처럼

좁은 구멍으로 기어 들어가 어느새 눈앞에서

사라져버릴 뿐인데

어떤 말에는 뼈가 있어

말의 척추고 곧게 서

환한 기억들 모두 일으켜 세운다

그러면 그날 거기서 만났던 사람들 모두

뼈를 얻어 곧게 일어나

역시 뼈가 있는 단단한 말로 내게

웃으며 말을 건네주고

그러면 나 역시 뼈가 있는 말로

그들에게 단단하고 청명한

울림이 되어주는 것이다

말로는 천당도 짓는다는 말도

실은 이런 의미일지 모른다

얼마나 좋은가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지어준 천당의 지붕 아래서

잠시 서로의 말이 드러낸 단단한

등뼈를 쓰다듬으며

우리가 헛것임을 잊을 수 있다

 

* 말에 뼈가 있습니다. 그 살을 모두 발라내야 말의 뼈가 드러납니다. 말로 천당도 지을 수 있고 말로  지옥도 지을 수 있겠지요. 내일 말로 천당을 짓고 그 지붕 아래서 쓰다듬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침

 

네팔의 라이족은 손님이 떠난 후 비질을 하지 않는다

흔적을 쓸어낸다 생각해서

 

손님은 떠나기 전 직접 마당을 쓴다

자기가 남긴 흔적 스스로 지우며

 

폐가 되지 않으려 애쓴다

깨끗한 마당처럼만 나를 기억하라고

 

쓸어도 쑬어도 쓸리지 않는 것들로

마당은 더럽혀지고 있었고

 

어차피 더럽혀지는 평생을 평생

쓸다 가는 것이겠지만

 

무엇보다 듣기 좋은 건

아침에 마당 쓰는 소리

 

언제나 가장 좋은 건

자고 일어나 마시는 백차 한잔

 

산중에 휴대폰도 없이

삼동(三冬)이 하이얗다

 

* 내일 일어나 들숨 날숨 나누고, 방 쓰는 소리, 그리고 차 한잔...그렇게 내일을 열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