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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book)/창비시선

《지금 그리운 사람은》 이동순, 창비시선 0057 (1986년 12월)

by Sisnaajinii(씨스나지니) 2024.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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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다래끼 - 農具(농구) 노래 2

 

할 수만 있다면

싸릿대로 이쁘게 엮은 종다리깨 하나

멜빵 달아 어깨에 메거나

배에 둘러차고 우리나라의 고운 씨앗을 한가득 담아

남천지 북천지 숨가삐 오르내리며

풀나무 없는 틈이란 틈마다 씨를 뿌리고

철조망 많은 무장지대 비무장지대

폭격 연습 한 뒤의 벌겋게 까뭉개진 산허리춤에다

온통 종다래끼 거꾸로 쏟아 씨를 부어서

저 무서운 마음들을 풀더미 속에 잠재우고도 싶고

또 할 수만 있다면

짚으로 기름히 엮은 종다래끼 하나

어깨에 메거나 배에 둘러차고

충청도 물고기 담아가서 황해도 시장에 갖다 주고

함경도라 백두산 푸른 냄새를 그득그득 담아와서

철없는 내 어린것에게 맛보이고 싶어라

이남의 물고기 맛고 이북의 풋나물 맛이

한가지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라

아, 할 수만 있다면 이렇게

우리나라는 하나여라 하나여라

하나여라

<1984>

 

이동순 시인으 <지금 그리운 사람은> 1부는 우리 선조들이 농사를 지을 때 쓰던  26개 농구를 소재로 지은 시를 담고 있습니다. 백두산 푸른 물도 마시고 제주도 맑은 지하 암반수도 마시는 때지만 사람은 자유로이 왕래가 어렵고 서로 욕설과 똥폭탄을 주고 받는 시절입니다. 당장이라도 전쟁을 벌일 듯한 이 한반도의 질린시키들 한테 질립니다. 그 입을 잘근잘근 지져도 시원찮고 멍석말이해서 거적에 말아 저 일본 후쿠시마 앞바다에 던져 버려도 시원찮을 한반도의 질린시키들입니다.

 

 

돌확 - 農具(농구) 노래 7

 

확도 방아확이라면 모르지만

그저 몇 줌치 안 되는 곡식이나 으깨어주며

장독대 옆에 붙어 살던 이놈 돌확이올시다

이래봬도 해내는 일은 푼수보다 많았지요

풍년 풍자 복 복자 옆구리에 새긴

제법 매끄러운 부자집 확도 보았지만

열이면 열 그냥 돌덩이를 우멍히 쪼아냈지라우

늘 미운 정 고운 정으로 낯익은 것이라곤

확 언저리에 제법 다소곳 앉은 팥돌이거나

체 얼게미 양푼 대소쿠리

온 마을이 말매미 소리에 잠겨들던 어느 초여름날

풋바심해온 보리껍질 벗기러 찾아와

멍하니 주저앉은 아낙의 한숨소릴 들었지요

확 깊은 집에 주둥이 긴 개가 찾아든다고

이런 한숨 들리는 그핸 꼭 흉년이 왔지라우

드디어 확 바닥에 빗물이 고여

뱀에 쫓긴 개구리라도 숨어들 땐 어찌나 좋었는지

아무도 아무도 이런 내 속을 모를거라

무싯날 매죄료장수가 지나갈 때

불러와서 한번쯤 쪼아 두면 못내 신이 나 돌았지요

지금 박물관 뜨락 앞에 해나 쬐고

골동가게에서 높은 흥정에 팔려가기도 하지만

대관절 신바람 안 돋는 게 이상하구먼요

<1984>

 

* 매죄료장수: 매통이나 맷돌의 닮은 이를 정으로 쪼아서 날카롭게 만드는 일을 업으로 하던 사람. 매조이꾼. '매죄료'하고 돌아다니는 데서 온 말.

 

이동순 시인은 '돌확'을 통해서 과거의 일상과 풍경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노래합니다. 돌확이 단순히 몇 줌의 곡식을 으깨는 도구에 불고하지만, 그 소박함 속에서 느껴지는 따뜻함과 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러 어려움과 흉년을 겪으면서도 꿋꿋하게 견뎌온 우리네 삶의 인내와 끈기, 그 속의 소박한 삶들, 그 소중함을 생각해봅니다.

 

 

연자매 - 農具(농구) 노래 13

 

이쯤이 연잣간 터였지 아마

지금은 무너지고 흔적조차 없구만

정미소의 전기방아를 당헐 수가 있어야제

쇠꽁무니 뒤를 따라 돌며

넉가래로 곡식 뒤집던 나 같은 께끼꾼이사

진작에 업을 바꾸었지

그때 맷돌 쪼어주던 석쇠아치 안씨는

요즘도 와서 장기 놀다 가는걸

판판한 돌판 위에 고줏대 박고

우물 井(정)자 방틀을 짜서 단단히 얾어맨 뒤

쌀 두 가마 값에 사온 맷돌을 사뿐 얹으면

소란 몸이 후리채 끌고

비잉빙 터벅터벅 돌아가여

벼는 겉곡 한 가마 벗기는 데 두 시간

알곡 안 다치게 물 뿌려주는 보리방아가 참 힘들었어

한 차례 돌리고는 햇볕에 말리고

찧고 말리고 찧고 말리고를 세 번 해야 돼

그것도 볕 좋은 날만 골라야 했어

그저 세상 이치라는 것도

연자매처럼 아랫윗돌이 잘 맞아야 혀

시방 놀고 있던 맷돌을 옮겨다가

장마 뒤 흙담 고칠 때 갖다 박았더니

방송국인가 신문사인가에서 나왔다는 사람들이

와서 묻고 사진도 찍어가고 해싸여

일저엔 웬 장사꾼이 차 끌고 와서

글쎄 담 속의 저걸 자꾸 빼서 팔라는구만

<1985>

 

 

"지난날의 농촌에서 농구는 제각기 하나하나의 소중한 세간이자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다.그러나 농사짓는 일이 남에게 내세울 것 못되고 농민의 사회적 지위도 그 어느 때보다 말이 아닌 오늘날, 이제 어딜 가서 예전처럼 생활 속에서의 그 애틋하고 건강하던 농본주의적 정서를 찾아나 볼 수 있을까. 강요된 시련 속에서도 곤혼과 우울을 잘 딛고 일어선 창비의 부활처럼 우리 모두의 본적지인 농촌이 드디어는 길고 깊은 혼수에서 깨어나, 밝고 생기 있던 원래의 즐거움을 되찾아가야 하리라."

 

* "87.1 성복", 그 분은 무탈하게 이 지구별에서 살아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