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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book)/창비시선

《前夜(전야)》 이성부, 창비시선 0030 (1981년 12월)

by Sisnaajinii(씨스나지니) 2024.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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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보다 더 큰 題目(제목)을 붙이자 - 한국일보 창간 25주년에

 

온 세싱 모두 잠들어도

깨어 있는 눈,

어둠의 결의로 어둠을 태워

날마다 날마다

우리들 가슴 벅찬 희망을 앞당기는

스물다섯 살 한국의 젊은 신문이여

강력한 신문이여.

 

모든 언어에

우리들 허파의 더운 피가 흐르고

볼펜 한 자루,

깨알 같은 활자들 하나 하나,

우리들 진실의 창끝으로 뒤바뀔 때

젊은 신문이여

강력한 신문이여

빛나는 도약의 큰 날개를 펴자!

 

찬 새벽을 찢는 역사의 맥박 소리,

힘찬 시동의 불길,

골목마다 거리마다

달리는 발자국 소리,

깨끗한 손길들,

세계의 이름모를 장소에도 다다르는

스물다섯 살 한국의 젊은 신문이여

강력한 신문이여.

 

한 사람의 평생이 가도

햇볕 안 드는 半島(반도)의 구석구석을 찾아

사랑의 밝은 빛살로 머물고,

목마르며 숨가쁜 사람들의

아픔 한복판에 이르러,

평등의 넉넉한 기쁨으로 넘칠

젊은 신문이여

강력한 신문이여

눈부신 자유의 큰 북소리를 울리자!

 

북소리를 울리자 젊은 신문이여

막힌 가슴 터져

봇물로 쏟아지는 우리네 사랑 위에

언어마저 사라진 통일의 감격 위에

그 지평선 위에

한국의 젊은 신문이여

종이보다 더 큰 제목을 붙이자!

<한국일보社報·1979>

 

  한국일보는 동화그룹 산한 대한민국의 조간 종합 일간 신문이었습니다. 창업주 百想(백상) 장기영이 1954년 태양신문을 인수한 뒤 제호를 <한국일보>로 바꾸면서 1954년 6월 9일 창간했습니다. 1960 ~ 70년대에는 <동아일보>와 함께 양대 산맥으로 꼽히던 메이저 신문이었습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와 함께 발행부수가 200만부에 달했던 4개 신문사 중 하나였으나, IMF 외환위기를 전후하여 급격히 사세가 기울었습니다. 한때 자매 스포츠 신문이 고우영 화백의 만화로 장안의 화제를 일으키며 불티나게 팔리기도 했습니다. 1965년에 한국 대중문화 예술의 발전과 예술인의 사기 진작을 위해 제정된 '백상예술대상'은 일간스포츠에서 주최했으나 2021년에 중앙그룹이 일간스포츠를 매각하면서 중앙그룹이 주최, JTBC가 독점 중계하고 있습니다.

  기레기들이 하늘을 우르러 너무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니는 시절, 언론의 비정상이 정상이라거 하는 시절, 이성부 시인의 시가 부끄러워집니다.

https://www.kpf.or.kr/front/board/boardContentsView.do?board_id=246&contents_id=1311a72eef6445958c98076e1405b158

 

한국언론진흥재단

한국 뉴스신뢰도 2단계 하락, 46개국 중 40위. 뉴스회피는 증가..“신뢰할 수 없거나 편향적” 작성자 : 작성일 : 2022.06.15 조회수 : 3141 [미디어이슈 8권 3호] 뉴스 신뢰 하락과 선택적 뉴스 회피 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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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아무 한 사람 들여다볼 수 없는 서울 살림

그래도 가슴 열어 살아가는 일곱 식구.

前生(전생)의 무슨 죄라면서

아들 며느리 다 먼저 보내고

큰손자 따라 무쇠 발걸음 떼어 놓았나니.

허리 굽혀 눈물 감춰

사람 사는 동네가 어디 쓰것냐.

갑갑해서 살 수 있어야제.

눈 오는 날이면 내 건너 양옥에 내리는

눈송이 바라보고

실눈을 떠

먼 데 남쪽 하늘 마주하시는 할머니.

증손자 두 녀석

던지는 눈덩이에 이마를 맞고

눈덩이 들어 두 볼에 비비시는 할머니.

슬픔도 안 보이고 기쁨도 안 보이는

얼굴 하나 계시나니.

지나가는 바람 한 점

길 잃은 개미 한 마리에도

고향 소식 물어보는 할머니 계시나니.

<世界의 文學·1978>

 

그 시절 우리네 할머니들...... 할머니에게 고향 소식 좀 전해주렴

 

 

蘭芝島(난지도) - 1979년

 

아름다운 자기 이름을 가진

서울 변두리 난지도에 와서

난지도 공기를 만나고

사람 사는 마을을 들여다보면 안다.

난지도에 와서

우리나라 시월 하늘

눈 비비며 바라보면 안다.

아니오 아니오 아니오임을 안다.

파리떼에게도 한잔 먹어라

소주잔을 권하고,

썩은 물 웅덩이에도 희망의 손발을 씻어내는

난지도에 와서 보면

우리나라 시월 하늘

서럽다 못해  왜 불타는 노을로 소리치는가를 안다.

왜 살아서 스스로 부서지고 싶은 것인가를 안다.

쓰레기에 파묻혀 놀던 개구장이들이

쓰레기더미 위에 누워 하늘을 우러른다.

제복의 여학생이 水色(수색) 종점에서 내려

십리길 걸어, 쓰레기 산 또 십리를 넘어

쓰레기 움막으로 기어든다.

밤이 되어

봉화산 의병 닮은 횃불들을 들고

밤하늘 덮는 먼지 속 몰려가는 사람들,

에헤야 디야, 에헤야 디야

쿵작작 쿵작작

여기서도 왼종일 라디오 소리 들리고

향수 뿌린 여인이 있어

악취에 코막힌 사내들의 가슴을 후벼준다.

서울의 거래한 오물 하차장,

개, 돼지, 짐승들도 숨막혀 아우성만 커진 곳.

사람과 쓰레기가 한몸이 되어

파리떼 속에서 사랑을 속삭이고,

온갖 꽃을 피우고

바람을 부르고 비를 부른다.

난지도에 와서

사람을 만나고

사람의 마을을 들여다보면 안다.

왜 모든 것이 아니오

아니오 아니오임인가를 비로소 안다.

<韓國文學·1979>

 

  상암동 영역 중 난지도는 1949년에 서울특별시로 편입되었습니다. 이곳은 유명한 신혼여행지로 이름을 날릴 만큼 풍경이 아름다운 섬이었다고 합니다. 섬의 이름도 난초가 많이 자란다고 해서 난지도로 불렸다고 합니다. 그런 아름다운 섬이 1978년 서울시의 쓰레기 매립장으로 지정되어 급속히 팽창하는 서울에서 쏟아낸 산업폐기물, 건설 폐자재, 생활 쓰레기로 90미터 높이의 언덕 두 개로 변했습니다. 1993년 3월 19일 17시 기준으로 완전히 폐쇄되고 지금은 월드컵 공원으로 조성되었습니다. 쓰레기 매립지가 된 난지도에도 많을 때는 거의 700여 명이 거주했습니다. 1981년 유재순 기자가 난지도를 무대로 한 <난지도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논픽션을 내서 한때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적도 있습니다. 또한 1980년대 중반에 정연희가 <난지도>라는 소설을, 이상락이 <난지도의 딸>이라는 소설을 써내기도 했습니다. 1990년대에 KBS에는 이를 소재로 난지도 특집 다큐멘터리를 2부작으로 제작하기도 하였습니다. 만화가 이향원도 난지도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왜 난 안 줘요?>라는 단편만화를 그려 만화잡지(‘보물섬’으로 추정)에 2회에 걸쳐 연재했었습니다.(https://namu.wiki/w/%EB%82%9C%EC%A7%80%EB%8F%84)

  사람은 지치지 않고 쓰레기를 만들고 있으니 수도권 김포 매립지뿐만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 난지도가 세워지고 있답니다. 제주도에 오름이 365개인데 협재 중산간 마을을 걷다보면 사람들이 만든 '난(난지)오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올레 14길을 걷다가 악취와 오염수를 맞닥뜨릴 겁니다. 쓰레기를 어떻게 줄일 수 있을까요? 사람이 줄어들면 쓰레기도 줄어들까요?

 

"돌아가신 스승 김현승 시인의 추천으로 1961년 <현대문학>지에 첫 작품이 발표된 지 올해로 꼭 20년이 된다. 소위 문단이라는 곳에 이름을 디밀고 살아온 이 20년은 나로서는 보람과 좌절이 함께 뒤섞인 세월이었으며, 항상 하는 일보다 해애 할 일이 더 많았던 자괴의 한 해 한 해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자책과 부끄러움이 최근 2, 3년 동안엔 더욱더 심해져서, 시를 발표한다는 행위 자체가 마음에 맞지 않는 것이 되고 말았다. 아니 시를 쓴다는 본능적인 일조차도 더럽고 죄스러운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이성부 시인은 1980년 5월을 함께 하지 못한 죄의식으로 절필을 선택합니다. 1980년 5월 광주항쟁의 역사적인 아픔으로 자신의 문학적 이상을 실현할 의지를 상실하였습니다. 이후 창작과는 거리를 두고 군부독재 시절을 침묵과 방황으로 보내며 산행을 매진하였습니다. 시집의 표제로 나오는 시 '전야'는 장편 서사시로 구성된 작품의 한 부분이었으나, 장편 서사시가 세상에 나오기 전에 시인이 운명을 달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