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감자와 고구마와 같은 낱말을
입안에서 요리조리 읽어보면
아, 구수한 흙냄새
초가집 감나무 고추잠자리 .....
어쩌면 저마다의 모습에 꼭두 알맞는 이름들일까요.
나무, 나무 천천히 읽어보면 묵직하고 커다란 느낌
친구란 낱말은 어떨까요.
깜깜한 압굴 속에서 조금씩 밝아오는 얼굴
풀잎, 풀잎 하고 부르니까
내 몸에선 온통 풀냄새가 납니다.
또 잠, 잠 하고 부르니까 정말 잠이 옵니다.
망아지 토끼 참새 까치 하고 부르니까
껑총거리며 잘도 뛰는 우리말
강아지 하고 부르니까
목을 흔들며 딸랑딸랑 방울소리가 나는 우리말
미류나무에서 까치 울음소리가 들립니다.
까작, 까작, 까작, 문을 열고 내다봅니다.
닳고 닳은 문 돌쩌귀 우리네 문 돌쩌귀
수톨쩌귀 암톨쩌귀 맞물고 돌아 매번 뒤틀리기만 하는 사랑
기다림 끝에 환히 밝아오는 정말, 사랑이란 이 낱말은 어떨까요.
읽으면 읽을수록 내가 그 문고리에 목을 매고 싶어지는
치사한 정, 더러운 정,
금방 눈물이 쏟아집니다요.
그러면 눈물, 이 말은 어떨까요.
1%의 염분과 99%의 물 ...... 물, 물, 물,
금방 범람하는 홍수
마침내는 허우적거리다 내 목은 물에 잠깁니다.
얼쑤 얼쑤 도깨비탈을 쓴 까만 뒤통수만 남는 춤
양반춤, 곰배춤, 병신춤, 곱사등이춤,
매품팔이로 흥부전에서 반짝 빛을 냈다 꺼지는 우리말
밥, 밥, 밥, 바압, 바압, 바아압, 바아압, 바아압, 바아 ......ㅂ
밥, 밥, 밥, 바압, 바압, 바아압, 바아압, 바아압, 바아 ......ㅂ
G. I. 시절
어디서 누룽지 타는 냄새
솥두껑 소리 ......
난리다, 하고 소리치니까
강화도 남한산성 의주가 고삐 풀린 말들처럼 뛰고
송장이다, 하고 소리치니까 뒤집혀 더오르는 발목들
토끼, 오리, 망아지, 토끼, 오리, 망아지,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백성? 공중? 대중? 시민? 민중? 아니다, 아니다,
그 요란한 함성에 묻히면서 나는 무엇인 줄도 모르면서
봉화불을 들고 뒤죽박죽이 되어
제기럴꺼 얼럴러 곶감이다 곶감 하니까
문 밖에서 호랑이도 놀라 내빼는 우리말
시냇물, 그 연약한 속삭임, 산골물, 그 끊이지 않는 ......
송수권(1940년 3월 15일 ~ 2016년 4월 4일) 시인은 1975년 <문학사상>에 '산문에 기대어'를 발표하며 등단하였습니다. 우리나라 대표 전통 서정시를 잇는 시인입니다. 송수권, 박재삼, 나태주 세 분의 시인을 한국의 현대시를 대표하는 3대 시인이라고도 한다고 합니다.
망월동 가는 길 2
어디서 왔는지
우리들의 도시 한복판에
오늘도
최루탄 개스가 왔다.
시민들은 잠시 모여 웅성거리다
차단된 도시의 심장부를 우회전하고
콧물 재채기 속에서
쌍, 까, 따, 말이 말을 잘라먹고
그 말들은 변두리의 풀섶에 떠도는
풀벌레 소리보다 힘이 없다.
연사흘 하늘의 빌딩에서 새떼 같은 삐라가 떨어지고
시민 여러분의 안녕을 묻는
마이크 소리가 지상의 철벽을 덮어 씌운다.
아, 불편한 우리들의 도시
우리들의 삶
가로수 잎새마다 회색 빗물이 흘러내리고
끝없는 벌판을 지나
망월동 가는 길
오늘 거기 닿는다 해도 누구 하나 서 있을 것 같지 않다.
앓을 병을 앓음으로써 끝내는 우황청심환 한 방울을 얻어
우리들의 정신을 맑히고야 말
오 무등이여, 여름 무더위 속에서도 젖가슴 풀어
이 벌판에 신선한 아침이 온다.
목이 쉬도록 요한계시록을 되뇌이며
너는 종일을 서서 뻐꾸기 울음 하나를 키워가는 것을 본다.
2024년, 아직도 광주와 5.18을 이야기하냐고 할지 모르지만, 지구별 곳곳에서 여전히 군대가 국민(시민, 민중)을 학살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시민, 청소년 그리고 군인의 생명이 하찮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21세기에 그런 일이 일어날까 싶지만, 몇 해 전 탱크와 특전사가 도심을 점령하는 계획이 오갔습니다. 민주주의는 신이 내려주는 선물이 아닙니다. 지켜내려는 사람들이 지켜내고 만들어 가는 것이 민주주의입니다.
임진강 오리떼
오는구나 잘들 오는구나
해마다 이맘 때면 저희들끼리
재잘거리며 훨훨 산을 넘어 강을 건너
임진강 너른 벌판에 털썩털썩 주저앉는구나.
와글와글 재잘재잘
와글와글 재잘재잘
함경도 낯익은 아비이 사투리 같고
평안도 낯익은 에미나이
감자밭 감자 캐는 소리 같고
내 살던 칠성문 밖
보통학교 하급반 시절
조선어독본 글 외는 소리 같고
보통강이 얼면 보통강에 나가
썰매 끌며 얼음 끄는 소리
와글와글 재잘재잘
와글와글 재잘재잘
개성 뒷산을 넘어 임진강을 건너
해마다 이맘 때면 국경선도 휴전선도
귀쌈을 패버리고
오는구나 잘들 오는구나
한 철을 살다 훌쩍 떠날
아, 우리는 오리떼만도 못한
네 아비 내 어미 원통하게
살다 죽은 땅
(오리떼는 산비탈 등성이에 그림자를 떨구고 세찬 하늘 여울물 휘감던 날, 아베는 오리치를 놓으려 논으로 내려가고 나는 기다리던 아베 오지 않아 아베 버선쪽 뒤집어 시악이 나서 물어뜯던 날)
오는구나 잘들 오는구나
휴전선도 국경선도 밀어붙이고
귀쌈을 패버리고
"남도의 하늘과 들과 맑은 바람, 이 무진장한 재보를 말로써만 표현하기에는 무엇인가 부족하다. 그것을 말하려면 오랜 시간의 체험을 통해서 영혼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다 ...... 나는 대체로 이 도시 안에서 삶이란 자체가 의심스러워지고 어처구니가 없을 때에는 슬슬 외곽지대를 돌며, 멀리 물러서서 무등을 바라보며 산다. '조급하게 살지 말아라. 남도의 하늘과 들과 바람처럼 살아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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