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잠
천년을 자야 깊은 잠이지
한 시간쯤은 일보다가 그대로 천년을
자야 그게 깊은 잠이지.
사람은 간사해서 겨우 7, 8시간 자고도
깊은 잠이라고 고래고래 소리치면서
온 세상천지를 활보하는구나.
불쌍한 것들,
우리가 뭐 나뭇가지에 걸린 이파리냐
아스라한 실 끝에 매달린 연이냐.
술잔 끝에 걸린 입술이냐
자동차들의 경적 끝에 매달린 운명이냐
참으로 불쌍한 것들.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하면서
겁을 줘도 먹지 않고
法을 줘도 길들지 못하는
우리는 참으로 잘난 것들이냐.
우리의 말이 없었다면
우리의 글자가 없었다면
우리의 마음들이 없었다면
이 볼펜 다 집어던지고
한 천년쯤 자다가
벌거숭이로 태어날 것인데.
<韓國文學·1987>
인간의 허영심과 나약함. 진정한 평화와 안식을 찾기 위한 성찰과 겸손이 사피엔스에게 더 필요해진 시대. 겸손하고 성찰하는 자세로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찾아나가셔요.
아직 살아 있기에
봄이 오면, 봄이 오면
피어나라 피어나라 해도
피어나지 않을거야
피어난다 피어난다 되풀이했던 말까지
다시 다시 불러들일거야
여름이 오면, 여름이 오면
푸르리라 푸르리라 해도
푸르르지 않을거야
푸르리라 푸르리라 되풀이했지만 말까지
다시 다시 불러들일거야
가을이 오면, 가을이 오면
떨어져라 떨어져라 해도
떨어지지 않을거야
떨어진다 떨어진다 되풀이했던 말까지
다시 다시 불러들일거야
겨울이 오면, 겨울이 오면
얼어라 얼어라 해도
얼지 않을거야.
언다 언다 되풀이했던 말까지
다시 다시 불러들일거야
아직 살아 있기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우리들몸 안팎으로 살아 있기에
봄 여름 가을 겨울 가릴 것 없이
한몸으로 한사랑으로 살아 있기에
슬프지 않고 부끄러울 뿐
기쁘지도 않고 고요할 뿐
아, 부끄러움과 고요함이 쌓여
깨끗한 용기가 되어 살아 있기에.
<성내운선생 회갑기념논문집·1986>
부끄러움과 고요함이 쌓여 깨긋한 용기가 되어 살아 있는가? 살아 갈 수 있을까?
산행에서
아침 일찍 산에 오르면
일찍 길들은 깨어 있고
나뭇잎 풀잎들도 깨어 있고
특히 이슬방울들은 영롱하게 피어 있읍니다.
山行(산행)은 혼자라야만 재미있읍니다.
다투어 말을 걸어오는 산속의 모든 것들은
소리가 곧아서
내 귓속에 틀림없이 들려옵니다.
혼자서라야 그걸 들을 수 있읍니다.
산들은 저녁내 잠을 자지만 아침 일찍
깨어납니다.
산들은 잠을 자면서도
아침 일찍 찾아올 손님을 위해
노래를 준비합니다.
노래뿐만이 아니라고요.
썩은 영혼을 위헤 새 영혼도 마련합니다.
산이여
인간이여
지금 우리들은 떨어져 있읍니다만
언젠가는 꼭 만나서
영원히 함께 뒹굴 것입니다.
그때는 조용 조용히 누워 있을 것이 아니라
더 큰 바위를 솟게 하고
더 큰 나무를 하늘 끝까지 세울 것입니다.
<동서문학·1987>
"아빠, 아빠는 산에 왜 와요?" "왜?" "아빠는 앞으로 걷기만 하잖아요? 물고기도 보고 풀도 보고 꽃도 보고 나무도 보고 볼게 얼마나 많은데. 천천히 보면서 걸으면 안돼요?" 아들한테 많이 배웠습니다. 이젠 저도 물고기도 보고 풀도 보고 꽃도 보고 버섯도 보고 나비도 보고 벌도 보고 나무도 보고 하늘도 보고 그렇게 산을 오릅니다. 영과 마음과 몸을 깨끗하게 씻어내면서요.
백두산
언제나 그러하듯 흰옷 입고
손을 마주 잡고 두리둥실 춤을 추며
모래알들 타는 가슴으로
슬픈 모가지를 쳐들어
당신을 부른다.
백두산!
허리 꺾인 채 통곡하면서도
잊어버릴 뻔하였구나.
오늘도 남녘땅을 거닐면서
한잔의 술을 쏟아부으면서
천지에 올라 아스라한 만주평원을 바라본다.
꿈결인가. 생시인가.
당신의 품에 안겨 흐느낀다.
아니야, 아니야, 우리 탓은 아니야,
오고 가지 못한 슬픈 마음들이여
님끼리 님끼리 총칼을 거두자.
오르고 오르다가 쓰러져
깃발로 된들 우리 슬퍼하지 않으리라
함경도 계집이, 평안도 계집이, 황해도 계집이
강원도 계집이, 충청도 계집이, 경상도 계집이
전라도 계집이, 제주도 계집이
오오, 팔도 계집이 한 하늘 우러러
강강수월래 강강수월래 춤을 추다가 쓰러져
깃발로 된들 우리 슬퍼하지 않으리라.
자작나무 숲 사이 풀 한 포기라도
우리 마음 한마음 아닌 것 없구나.
그대로 있으려는가.
천지여,
맑은 가슴이여,
차라리 울음이여,
침묵이여.
<主流·1986>
금방이라도 송악산도 묘향산도 백두산도 다녀올줄 알았드니 북한 인민의 똥오줌 벼락이나 받고있으니, 이 땅에 어떤 일들이 벌어지려고 ...... 강강수월래 팔도 조선인, 조선족, 고려인, 해외교포 모두 모두 손잡고 강강수월래.....
"사람은 누구나 나름대로의 마음과 고향을 가지고 지금 이곳의 현실에 살고 있을 것입니다. 이 마음과 고향과 현실이 있기에, 저마다 꿈을 지닌 채 노동을 하고 장사를 하고 정치를 하고 학문을 하고 예술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학행위도 이 마음과 고향과 현실과 꿈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 믿음은 내가 시를 써오는 동안 줄곧 진실로 믿어온 터다."
'책(book) > 창비시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前夜(전야)》 이성부, 창비시선 0030 (1981년 12월) (0) | 2024.07.01 |
---|---|
《아도》 송수권, 창비시선 0052 (1985년 10월) (4) | 2024.07.01 |
《龍仁(용인) 지나는 길에》 민영, 창비시선 0011 (1977년 8월)ㅡ (0) | 2024.06.30 |
《고두미 마을에서》 도종환, 창비시선 0048 (1985년 3월) (0) | 2024.06.30 |
《피뢰침과 심장》 김명수, 창비시선 0055 (1986년 8월) (0) | 2024.06.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