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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book)/창비시선

《봄 여름 가을 겨울》 이은봉, 창비시선 0078 (1989년 9월)

by Sisnaajinii(씨스나지니) 2024.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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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한강은 흐른다 마구 튀어오르는

온갖 잡동사니, 썩어 문드러진 서울의

불빛을 감싸며 한강은

죽음의 찌꺼기를 궁정동의 총성을

실어 나른다 토막난 나라

그 남쪽의 노동과 밥과 꿈

오월의 한숨과 피울음을

개거품처럼 주억거리며 한강은

흐른다 차마 그냥 말 수는 없다는 듯이

몸뚱이를 가로지르는 다리 위

밀려가는 버스와 트럭과 택시와

그렇게 질주하는 눈물을 껴안으며

살해당한 대통령과 그의 처첩들

오오, 환상의 미래와 지난 시대를

실어 나른다 무수한 굴욕과 저항의 나날을

묻어버린다 그래도 그냥 말 수는 없지 않겠냐며

천천히 더러는 빨리

숱한 희망과 변절의 역사를

집어삼킨다 그러나 한강은 끝내

남아서 지킨다 우리의 죽음 뒤

우리의 자식이 남아서 우리를 지키듯이

이 땅의 핍박과 치욕의 응어리를

급기야 해방의 함성을, 그 아픔을

기쁨을 지킨다 혼자서 더러는 여럿이

한강은 흐른다 댐이 세워지고

별별것들이 다 그를 막아서더라도

바다로, 화엄의 바다로 한강은

오늘도 까막득한 내일까지도.

 

이은봉 시인의 시 '한강'은 한국 현대사의 고통과 희망을 담은 작품입니다. 한강은 단순한 강이 아니라, 한국의 역사와 민족의 고난, 저항, 희망을 실어 나르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한강은 썩어가는 도시의 불빛, 죽음의 찌꺼기, 노동과 꿈, 고난을 품고 흐르며, 그 속에는 억압과 저항, 피울음과 희망이 뒤섞여 있습니다. 한강은 서울의 어두운 면과 여러 역사적 사건들을 품고 흐릅니다. 썩어가는 불빛을 감싸고, 1979년 10.26 사건을 암시하는 궁정동의 총성을 실어 나르며, 비극적인 역사를 상징적으로 담아냅니다. 한강은 분단된 조국과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상징하며, 그 속에 담긴 슬픔과 고통이 강물처럼 흐릅니다. 한강은 과거의 고통을 잊지 않고, 그 역사를 지켜내며 우리의 죽음 뒤에도 남아 우리 자손들을 지켜주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단순한 자연이의 강이 아니라, 민족의 역사와 정체성을 이어주는 상징입니다. 한강은 해방의 함성과 그 아픔과 기쁨을 지키며, 과거의 고난을 잊지 않고 미래의 희망을 품고 나아갑니다. 댐이나 장애물에 막히더라도 바다로 향하는 한강은, 한국의 끈질긴 생명력과 희망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이 시는 한강을 통해 한국 현대사의 고난과 저항, 희망을 담담하게 그려냅니다. 한강은 비극적인 역사를 실어 나르지만, 그 기억을 지우지 않고 해방과 희망의 미래로 나아가는 힘을 상징합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산빛이 붉게 물들고

울안의 감나무 잎새도 그렇게 물들고

새벽바람으로 감나무 잎새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하면

가을이다 봐라 가을이다

가을이 지나면 내리는 눈

등어리에 눈더미를 지고 겨울이 온다

외투깃에 모가지를 묻는 겨울이 온다

허심탄회 얼어붙는 겨울,

가을 그리고 겨울이다

누가 이 겨울을 여름이라 하는가

여름은 봄이 지나고 온다

머리에 푸르른 숲을 이고 차례로 온다

이 사람아 이젠 제발 두려워 말고

눈 덮인 자네 집 뒷들을 파헤쳐 보라

연탄재 라면봉지 시멘트 조각 속에서도

온갖 생명들 웅크려 떨고 있다

봄을 기다려 떨고 있다

어린애가 자라서 어른이 되고

송아지가 자라서 어미소가 되는 법

이 한심한 사람아 미치광이야

요처럼 당연한 이치까지 깨부수면 어떻게 하나

어떻게 다 큰 암탉이 병아리로 돌아갈 수 있고

아름드리 당산나무가 어린 묘묙으로 돌아갈 수 있나

그러고 보면,

정작 깨부술 것은 번쩍이는 그대 이마빡

욕정의 찌꺼기다 질서를 좋아하는 사람아

봐라 이게 만물의 질서다

겨울 가을 여름 봄이 아니라

봄 여름 가을 겨울이다.

 

이은봉 시인의 시 '봄 여름 가을 겨울'은 자연의 순환과 인생의 이치를 담담하게 성찰한 작품입니다. 시인은 계절의 흐름을 통해 삶의 변화와 자연의 질서를 이야기하며,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자연스러운 법칙을 강조합니다. 시의 첫 부분에서 가을이 시작되고 겨울이 찾아오는 모습을 그리며, 계절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감나무 잎이 떨어지고 눈이 내리는 풍경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삶도 자연스럽게 변화함을 상징합니다. 겨울은 가을 뒤에 오고, 추운 계절을 지나야 다시 봄이 올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중반에서 시인은 자연의 질서를 부정하거나 두려워하는 태도를 비판합니다. "누가 이 겨울을 여름이라 하는가"라는 구절은 계절의 순서를 무시하려는 행동을 꾸짖으며, 자연의 순리는 거스를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봄이 지나야 여름이 오고, 여름이 지나야 가을과 겨울이 오듯, 모든 것은 정해진 순서대로 흘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부분에서는 겨울 동안 땅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생명들을 이야기하며, 이 생명들이 봄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모습을 통해 희망과 생명력을 암시합니다. 시인은 자연의 변화 속에서 인간의 욕망과 두려움을 경계하며, 이를 거스르려는 어리석음을 꾸짖습니다. "다 큰 암탉이 병아리로 돌아갈 수 없고," "아름드리 당산나무가 어린 묘목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표현은 시간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음을 보여주며, 자연의 순리를 받아들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 시는 모든 것이 자연의 질서에 따라 흐르고, 그 흐름을 순응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시인은 삶의 순리와 자연의 이치를 강조하며, 이를 부정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경계합니다. 그리고 희망의 봄이 올 때까지 인내와 기다림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이 시는 삶의 변화와 자연의 순환을 계절의 흐름에 비유하며, 인간이 지혜롭게 받아들여야 할 삶의 태도를 담백하게 전달합니다.

 

 

사랑에 대하여

 

개나리 꽃밭에서

이 엄청난 개나리 꽃밭에서

샛노랗게

노랗게 터져오르는 꽃망울들이

사랑임을 배운다

저 자유가 사랑임을

퍼뜩 깨닫는다 들녘에서

들녘 논두렁에서

대궁 쫑긋하게 피워올리는

독새풀밭에서

저 굉장한 독새풀씨들이

사랑임을

혁명임의 한순간임을

배운다 지구를 움직이고

태양을 거기 있게 하는 것도

저 씨앗들 속 조그만 생명임을

깨닫는다 미꾸라지

송사리떼가 헤엄치며 놀고 있는

도량물길도 사랑임을

그렇게 하나임을

천지개벽으로 깨닫는다

진달래꽃밭에서

붉게 붉게

죽었다 살아나는 봄동산에서

부활을, 해방의 노래를 배운다.

 

이은봉 시인의 시 '사랑에 대하여'는 자연 속에서 발견한 사랑과 생명의 본질을 담고 있습니다. 시인은 개나리 꽃, 독새풀밭, 미꾸라지와 송사리떼, 진달래꽃밭 등 자연의 다양한 모습 속에서 사랑, 혁명, 부활을 깨닫고 배워 나갑니다. 개나리 꽃밭에서 시인은 샛노랗게 터져오르는 꽃망울을 보며 사랑을 느낍니다. 자유롭게 피어나는 이 꽃들이 곧 사랑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고 강렬하게 깨닫는 순간을 통해 사랑이 자유와 연결되어 있음을 전합니다. 사랑의 본질은 억압되지 않은 생명의 활기에서 비롯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독새풀밭에서는 씨앗들이 가진 생명력이 사랑임을, 그리고 그것이 혁명의 순간임을 배웁니다. 작은 씨앗 속에 담긴 생명이 지구와 태양을 움직일 만큼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깨달음은, 사랑과 생명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혁명적인 힘임을 상징합니다. 도량물길에서 미꾸라지와 송사리떼가 헤엄치는 모습을 보며, 작은 생명들의 움직임조차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물길 속에서 일어나는 작은 생명들의 움직임이 하나의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며, 이는 모든 생명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합니다. 진달래꽃밭에서는 부활과 해방의 노래를 배웁니다. 붉게 피어나는 진달래꽃은 죽음과 부활의 상징이며, 자연 속에서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생명과 해방을 노래합니다. 이를 통해 새로운 시작과 희망을 담고 있습니다. 이 시는 자연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는 과정을 통해, 사랑이 곧 생명이고, 그 생명이 혁명적인 힘을 지니고 있음을 전합니다. 시인은 자연의 작은 생명들 속에 깃든 사랑과 생명력이 세상을 움직이고 변화시키는 힘임을 부드럽고 담담하게 그려냅니다.

 

 

자유에게

 

네 이름을 알고 있다

자유여, 너를 알고 있다

네 출신성분을

고향을, 역사를 알고 있다

네 몸에선 피의 냄새가 난다고

몸부림치던

으스러지던 옛 시인도 불행히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몸부림치지 않으마 네 이름을 외치다

결코 으스러지지 않으마

그저 속삭이듯

속삭이듯 말하마 우리 한번

네 입술을 덥쳤을 때

벼락치듯 세상을 감전시키던

단호박 냄새를, 미칠 것 같던

웃음소리를 잔잔히

첫 키스의 기쁨을 말하마

그해 오월 남녘 땅 한구석에서

터져오르던 횃불이 아우성이

몸살나던 황홀이 바로 너라고

조용히 조용히 내가 말하마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되는 날까지

쉬지 않고 내가 말하마 네 이름을

너를 일러 사랑이라고

죽음이라고 부활이라고 말하마

자유여, 그러나 나는 또 알고 있다

네 조상을 피의 족보를

공동묘지의 따스한 햇살을 잘 알고 있다.

 

이은봉 시인의 시 '자유에게'는 자유를 향한 깊은 사유와 열망을 담고 있습니다. 시인은 자유를 단순한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역사적 경험과 개인적 체험 속에서 구체적으로 그려냅니다. 이 시는 자유의 본질, 그리고 그에 따르는 고통과 희생, 궁극적으로는 희망을 차분하게 전달합니다. 시인은 자유의 출신, 즉 자유가 지닌 역사와 그 속에서 흘린 피를 알고 있다고말합니다. 자유는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고통과 희생 속에서 쟁취된 것임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옛 시인이 몸부림치며 외쳤던 자유가 피와 고통 속에서 형성된 존재임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은 몸부림치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절망적인 투쟁이 아닌, 조용하지만 확고한 방식으로 자유를 추구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속삭이듯 자유를 말하겠다는 태도는 내면의 깊은 결의를 상징하며, 자유를 격렬한 투쟁만이 아닌 삶 속에서 느끼는 기쁨과 사랑으로도 표현합니다. 벼락처럼 세상을 감전시키는 황홀과 첫 키스의 기쁨을 통해, 자유는 단지 투쟁의 결과만이 아니라 삶의 기쁨과 사랑임을 전합니다. 1980년 오월의 남녘 땅에서 터져 나왔던 횃불과 아우성이 바로 자유였다고 말하며, 시인은 광주 민주화운동을 떠올립니다. 이때의 뜨거운 희생과 결단이 자유와 얼마니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를 일깨워줍니다. 그 역사를 통해 자유가 얼마나 값진 희생으로 이루어졌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시인은 자유를 사랑, 죽음, 그리고 부활이라고 부릅니다. 자유는 단순한 이상이 아닌, 피와 희생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고귀한 가치임을 강조합니다. 공동묘지의 따스한 햇살은 그 고통 속에서도 새로운 시작과 희망이 가능함을 상징하며, 자유는 언제나 부활할 것이라는 믿음을 전합니다. 이 시는 자유를 향한 투쟁과 희생,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난 사랑과 부활의 힘을 이야기합니다. 자유가 고통과 피의 역사를 지닌 존재임을 알면서도, 시인은 확고한 결의로 사랑과 희망 속에서 자유를 추구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잊어버렸네: 최씨의 말

 

잊어버렸네

정말이네 다 잊어버렸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벌싸 십수년 전의 일

왜 못 잊겠나 까닭없이 끌려가

그 방, 그 지하실 불빛

너무 붉어 미칠 것 같던

그 죽음의 빛깔을 왜 못 잊겠나

치고 패다 지쳐

온몸 발가벗긴 채

물 적셔 전기고문

손톱 끝에 대침

핏물 든 좆끝을 핀셋으로

집어당기다 툭툭 두들기다

심심하면 옆구리를

턱주걱을 구둣발로 걷어차던

자네, 자네 부하들도 자네

왜 못 잊겠나 깡그리 잊어버렸네

못 잊고 차마 어떻게 사나

그날의 분노며 수치심이며

비명소리며 못 잊고 어떻게 사나

자네가 총맞고 뒤져

꽃상여로 황천길로 떠나던 날

나는 너무 기뻐

영정의 치켜뜬 눈

콱! 쑤셔버리고 싶어 몸살났었네만

다 잊어버렸네 왜 못 잊겠나

자네 망령이 살아

우리 아들딸 길길이 뛰는 놈

마구 칫밟는데 감금하는데

내가 왜 못 잊겠나

정말이네 다 잊어버렸네.

 

 

 

"배워야 할 것이 너무도 많다. 그렇다. 수천 년 시의 역사는 자연의 운동법칙을 통해 삶의 운동법칙을 형상화해 왔다. 그렇다면 여전히 시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자연 속의 사물의 질서가 아니라 삶 속의 사람의 질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삶 속의 사람을 바로 깨닫기 위해, 사람의 자유와 해방과 사랑과 혁명을 바로 실천하기 위해, 아아 나는 얼마나 많이 자연의 질서를 공부했던가. 무엇을 쓸 것인가, 이제 문제는 보다 분명해졌다. 그리하여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것들을 개별적이고도 특수한 형상으로 포착, 보편적이고도 대중적인 것으로 드러내어 사회현실에 응용하느냐일 것이다. 좀더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경험과 관찰이 필요하리라."

 

'1991.3.20. 수. 안개비 오던 날'이라고 적어둔 이는 지구별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요? 그해 그 안개비 내리던 날 시집을 손에 꼭 쥐었던 날을 잊지않고 살고 있을까요? 이 지구별 작은 인간 그이도 이 지구별에서 긴호흡 나누며 환한 미소 나누며 살고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