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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book)/창비시선

《벌거숭이 바다》 구자운, 창비시선 0008

by Sisnaajinii(씨스나지니) 2024.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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龜裂(균열)

 

그건

어떤 깎고 닦은 돌 面相(면상)에 龜裂(균열)진 금이었다.

어떤 것은 서로 엉글어서 楔形(설형)으로 헐고

어떤 것은 아련히 흐름으로 계집의 裸體(나체)를 그어놨다.

그리고 어떤 것은 천천히 구을려

또 裸體(나체)의 아랫도리를 풀이파리처럼 서성였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러한 龜裂(균열)진 금의 아스러움이

        그렇다, 이건 偶發(우발)인지 모르지만

내 늙어 앙상한 뼈다귀에도 서걱이어

때로 나로 하여금

허황한 꿈 속에서 황홀히 젖게 함이 아니런가? 고,

<1955. 3. 現大文學(현대문학)>

 

  구자운 시인은 1955년 서정주 시인의 추천으로 문단에 등단했습니다. 모더니즘이 팽배했던 1950년대 문단에서 한국 전통시의 서정성 회복을 위해 애썼다고 합니다.1960년을 기점으로 이후 탐미적인 시, 언어적 세련미 추구 경향에서 현실적, 시대적 경향으로 변화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후 경제적 곤궁과 개인적 불운이 겹치면서 어렵고 힘든 시기의 고백이 묻어나는 시가 많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구자운 시인은 환속하여 세상에 나온 고은에게 호의를 베풀어 그를 자기 집에서 먹고 자게 해줬는데, 그 은혜를 구자운 시인의 아내와 간통함으로써 갚았다고 합니다. 시인의 부인은 자녀들을 버리고 야반도주해버렸고 소아마비 장애가 있었던 시인이 홀로 아이를 키우며 번역으로 생계를 이었다고 합니다. 시인은 불편한 몸, 믿었던 이의 배신, 가난의 고통을 폭음으로 달래다 47세에 위암으로 요절하였습니다. 고은 시인은 자기 때문에 가정이 박살나고 요절한 시인의 시신 옆에서 사발에 막걸리를 부어놓고 젓가락을 두들기며 반야심경을 읊고 있었다고 합니다(출처: 나무위키).

 

 

 

「가랑잎과 여자의 마음」에서

 

나는 알 수 없다.

나뭇잎이 하늘거리며 그대 눈에서 지는 것을,

그리고 먼 달밤이 바다에 잠기는 것을,

나는 책장을 덮는다.

 

마음은 상기 쫓고 있다.

그대가 비슬거리며 사라져 간 발자욱을,

그것이 무엇인지?

나도 아무도 그것을 모른다.

 

오늘도 창에는 나뭇잎이 울고 있다.

구름은 바람과 노닐고 있다.

내 가슴은 벽이런가.

늘 어둠이 엉기어서 떠나지 않는다.

 

나는 다만 느낀다.

발갛게 화로의 불이 타오르는 것을,

무슨 까닭인가,

그대 염통은 상기도 여기 있는데,

<1959. 11. 現大文學(현대문학)>

 

 

모두 다 떠나버린 다음

 

너희들이 모두 다 떠나버린 다음

나도 천천히 일어나 가리라.

 

         어듭고 고된 나달이여,

내 사랑, 변함이 없는 길이라면

진실을 찾아 헐벗고 방황하는 것은

아름답고 외로운 깃발이리니.

 

그러나 너희들 웃음을 마련하여

모두들 훌훌히 떠나버린 다음에

 

남는 것은 이지러지고 새로운 모습들.

 

괴로움에 등을 지고 가버린 이를

탓하지 말자. 다만 말하리라,

우리를 더불어 한때를 예 있었거니,

 

어둡고 고된 나날이여.

사랑과 더불어 끝이 없거라.

 

 

일하는 者(자)의 손에 대해서 

 

일하는 자의 손에 대해서

할말이 없는 지는 말하지 마라.

 

한밤중에도 쉬지 않는

기름때 톱니바퀴.

 

쓰라임을 벗하며 살아가는 자의

노래를 듣는가? 듣는가

 

손은 만든다, 역사의 진리를.

파도가 모두 다 휩쓸어간 다음에도 남아 있음

 

은밀한 가운데 서로 잡은 것들

엉클어진 질기디질긴 의지들이다.

 

잠자지 않는 자들은

일하는 자들이다. 지금은 땅속에

 

스스로 어둠을 찾아 보이지 않는 태양,

그러나 고뇌와 더불어 그것은 존재한다

 

펄럭이는 이념을 아침에 본

일하는 자의 손들은 일제히

 

아우성을 던진다. 아우성을 던진다

전쟁과 기아의 소문으로 음산한

 

폐허의 땅에. 웃음과 같이 북밭치는

파도의 일하는 자의 손.

 

일하는 자의 손에 대해서

할말이 없는 자는  말하지 마라

 

끄떡않는 탱크의 캐터필터,

일하는 자의 손에 대해서.

<1972.1. 月刊文學(월간문학)> 

 

1976년 12월 21일 인쇄, 1975년 12월 26일 발행..... 오탈자 겠군요. 이 책을 찍기위해 노동을 했던 식자공은 은퇴를 하고 자 활자들은 어디에 있을까요?

 

1979년 7월 3일 멋진 사인을 책 뒤 쪽에 남기고 이 책과 첫 인연을 맺었던 분은 어디에서 어떻게 지낼까요? 그리고 왜 그 멋진 사인을 남기고서는 이 책이 헌책방으로 흘러흘러 그리고 저한테까지 이르게 되도록 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