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
내가
창가에 앉아 있는 날씨의 하얀 털을
한 손으로만 쓰다듬는 사람인가요?
그렇지않습니다
다섯개의 손톱을 똑같은 모양으로 자르고
다시
다섯개의 손톱을 똑같은 모양으로 자르고
왼손과 오른손을 똑같이 사랑합니다
밥 먹는 법을 배운 건 오른손이 전부였으나
밥을 먹는 동안 조용히
무릎을 감싸고 있는 왼손에게도
식전의 기도는 중요합니다
사교적인 사람들과 식사 자리에 둘러앉아
뙤약볕 같은 외로움을 견디는 것도
침묵의 몫입니다
혼자가 되어야 외롭지 않은 혼자가 있습니다
밥을 먹다가
왜 그렇게 말이 없냐고
말을 걸어오면
말이 없는 이유를 생각해보다
말이 없어집니다
다섯개의 손톱이 웃는 모양이어서
다섯개의 손톱도 웃는 모양이라서
나는 그저 가지런히 열을 세며 있고 싶습니다
말을 아끼기에는
나는 말이 너무 없어서
사랑받는 말을 배우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식탁 위에는 햇볕이 한줌 엎질러져 있어
커튼을 쳐서 닦아내려다
두 손을 컵처럼 만들어 햇볕을 담아봅니다
이건 사랑받는 말일까요
하지만 투명한 장갑이라도 낀 것처럼
따스해지기만 할 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침묵을 오랫동안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신 곁에 찾아와
조용히 앉아만 있다
조용히 사라지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가 나의 원소입니다
조온윤 시인의 시 '묵시'에서 시인은 내면의 깊은 곳을 탐구하고 일상 속의 작은 순간들을 통해 자신과의 관계를 깊이 있게 들여다봅니다. 침묵과 소통의 중요성을 탐색하고 침묵을 오랫동안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공감, 그러한 침묵이 자신을 구성하는 원소라고 강조합니다.
그림자 숲
나무가 아니라
나무의 그림자가 우거져 있었다
우는 건 새가 아니라 새의 마음이었다
숲으로 가 숲을 보는 대신
눈을 감고 숲으 고요를 떠올렸다
잠을 자려다 문득
내가 원하는 건 잠이 아니라
잠 속의 산책이 아닐까
행복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들이 아닐까
숲의 그림자와
그림자의 숲
잠 속에서 나는 어딜 걷고 있는 걸까
새는 안 보이는데 자꾸 새의 그림자만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갔다
누군가 날아가는 새떼를 가리키는데도 여전히
발밑에 떨어진 그림자만 보고 있었다
거기서
새의 마음을 찾으려는 것처럼
눈을 뜨지 않아도
눈꺼풀 너머로 볼 수 있었다
새를 기르지 않아도 새를
사랑할 수 있는 것처럼
시인은 '그림자 숲'에서 말 그대로의 현실보다는 그것의 반영, 그림자, 또는 내면에 존재하는 감정과 생각들을 중심으로 노래합니다. 보이는 것들의 내면에 존재하는 무형의 감정과 연결을 탐구하며, 외부 세계와의 직접적인 상호작용보다는 내면의 깊은 곳에서 느끼고 반응하는 방식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오존주의보
높은 하늘 어딘가에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너희가 살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우리는 겁에 질린 개미처럼 소란하게 흩어졌다
공중을 향해 돌멩이를 던지는 사람
돌멩이를 줍는 사람 돌멩이를 파는 사람
발을 딛지 못하게끔
온 땅에다 불을 지르려는 사람도
쨍한 하늘을 올려다보면 언제나
눈썹을 찡그리고 마는 우리를 위해
너희는 투명한 손차양을 만들어주지만
오직 햇빛만을 통과시키는 비닐하우스처럼
너무 쉽게 찢어지고
풀어지는 몸을 지니고 있지
사람들은 투명한 컵에 담긴
투명한 물을 두고도
마실 수 있는 걸꺼 의심을 하지
그러니 공중을 떠다니는 것들아 내려오지 마
혹여 지상에 발을 딛게 되거든
우릴 찾아오지 마
우리는 결코 너희의 가벼움을
이해하지 못할 거야
민져지지 않으면 마음이 존재함을
인정 않는 우리에게
너희의 투명함은 사랑받지 못할 거야
그을린 발바닥처럼 뜨거운 먹구름이
사람들의 정수리를 밟으며 지나가네
우리가 놓쳐버린 풍선들을 거두고 고도에서
공기보다 가벼운 몸을 쥐고 둥둥 떠 있네
투명한 빛을 볼 때면 언제나
마음과 상관없이
찡그린 표정이 되어버린 우리지만
사라지지 마 사람들이 쏘아 올린 미움은 다시
사람들의 머리 위로 떨어질 테니
돌멩이를 쥔 손은 가벼워지지 못할 거야
끝냐 닿지 못할 거야
'돌멩이를 던지는 사람, 돌멩이를 줍는 사람, 돌멩이를 파는 사람'. 이는 우리네 삶의 단면입니다. '사람들이 쏘아 올린 미움은 결국 사람들의 머리 위로 떨어질 테니', 인간의 행위는 결국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인과응보. 처녀막을 찢고, 흐느끼는 소녀의 엉덩이를 주물럭 거리며, 붉은 피로 얼룩진 하얀 시트를 흔들대는 폭군처럼, 너, 인간아. 찢어진 오존막 사이로 쏟아지는 직사광선에 타 죽어가는 줄도 모르는 어리석은 벌거벗은 임금들이여, 정말로 보무도 당당히 죽고 싶다면 너희만 죽어라. 지구별 공동체는 살아야 하니까.
계절산책
여름에는 그늘 아래만 따라 걷다가
겨울이면 별뉘를 찾아 두리번거리지
운동장에 선을 긋고 오엑스 퀴즈를 푸는 것처럼
사람들은 우르르 마음을 바꾸며 살아가네
매일 다른 기분이 되어 사나보다
매일 다른 노래가 되어 사나보다
구름은 끄덕이며 매일 다른 하늘을 보여주지
도무지 싫지가 않지 이런 변덕과 회복
창문은 내키는 쪽으로만 고개를 내밀지만
언제든지 열릴 수만 있다면
누군가는 여름 정장을 입고
누군가는 모직 코트에 부츠를 신고
거리마다 달라지는 계절을 볼 수도 있겠지
그러다가
아직 아무도 모르게 고여 있는
빛 웅덩이를 만나면
누군가는 거기 멈춰 더운 땀을 말리고
누군가는 차가워진 발등을
씻어보이기도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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