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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book)/창비시선

《그 모든 가장자리》 백무산, 창비시선 0345

by Sisnaajinii(씨스나지니) 2024.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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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카드
 
  스포츠 뉴스에 잠깐 스쳐 지나간 그 심판을 똑똑히 기억할 순 없지만 그가 게임을 위기에서 구하는 것을 보았다.
 
  열광하던 관중 가운데 존 레넌을 닮은 한 사내가 자지를 내놓고 축구장을 가로질렀다가 경기는 플러그 뽑히듯 중단되고
 
  보다 못한 선수 한명이 달려가 온몸으로 태클을 걸어 그 벌거숭이를 자빠뜨렸을 때 난장판이 된 경기장은 정리가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심판의 판단은 달랐다
 
  심판은 태클을 건 선수에게 달려가 주저없이 레드카드를 내밀고 퇴장시켜버렸다
 
  골을 얻어맞은 선수가 항의하자 심판은 손가락을 잔뜩 발기시키고 똑똑히 말했다 "당신은 관중을 모독했어!"
 
  심판은 경기의 규칙이 아니라 경기장의 규칙을 지킨 것이다 경기장의 규칙은 관중이 구매한 것이다 조기회 축구가 아니면 관중 없이는 경기도 없다 선수가 관중에게 태클을 거는 행위는 경기장에서 짜장면을 시켜 먹는 짓이나 같은 것이다
 
  경기 중단도 경기의 일부다 관중의 일탈도 야유도 경기장의 일부다 태클은 경기의 기술일 뿐이다 선수가 경기장에 태클을 거는 행위는 관중에 대한 지독한 모독이 분명하다
 
  시민들이 분노하여 광장에 뛰어들었다고 공권력이 태클을 거는 것은 사회라는 운동장의 규칙을 무시하는 처사다 누군가 공권력에 레드카드를 내밀어야 하는 것이다
 
  존 레넌처럼 생긴 남자는 벌거벗은 광대이며 이성적 광기의 유령 같은 존재이다
 
  스포츠뉴스에 잠깐 비친 그 심판이 누구인지 모르나 나는 나의 시가 레드카드가 되어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백무산 시인의 '레드카드'는 축구 경기에서 벌어진 사건을 통해 사회적, 정치적 상황을 은유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시는 권력의 부조리와 남용, 시민의 권리와 저항을 다루며, 시인은 자신의 시가 레드카드가 되어 부당한 공권력에 맞서고자 하는 의지를 표현합니다. 이 시가 발표되기 이전, 대한민국은 광우병 사태,  쌍용자동차 사태, 용산 사태, 4대강 사업, 무상급식 논란과  서울 시장 보궐선거, 반값 등록금 운동, 한미 FTA  논란, 저축은행 사태, 부동산 경기 침체, 삼성 반도체 백혈병 논란, 청년실업 문제 등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로 공권력과 충돌을 겪었던 시기입니다. 백무산의 '레드카드'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대한 경고와 저항의 메세지를 담고있습니다. 그렇지만 자지를 덜렁거리며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관중, 그에게 태클을 거는 선수, 그 선수에게 레드카드를 내미는 심판, 그리고 레드카드를 왜 내밀었는지 이 시를 읽다보면 저절로 얼굴에 빙그레 웃음이 나옵니다.
 
 
수수꽃다리 다섯그루
 
  아이들 부축을 받으며 노인이 돌계단을 밟고 암자로 올라왔다 어린 손자의 가슴엔 할머니 영정이 들려 있었다
 
  마당가에 아름드리 오동나무가 보이자 핏기 없던 노인의 얼굴이 상기되면서 가만히 나무를 올려다보다가 두 팔로 한참을 꼭 껴안아도 보다가
 
  목을 쑥 빼고 담장 너머 뒷산을 바라보다가 산 너머 구름을 올려다보다가 뻐꾸기 우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생각에 잠기다가
 
  으스름 뒷산에서 총성이 울린 건 노인의 젊은 시절이었다 다급하게 청년이 숨어든 곳은 마을 외딴집 눈이 먼 애기무당이 홀로 법당을 지키고 사는 집이었다 애기무당은 그를 곁방에 숨겨주었다
 
  밤이면 산으로 갔다가 첫닭이 울기 전에 돌아오고 낮엔 숨어지내다 어느날 건넛산에 불길이 솟고 총성이 요란하더니 청년은 돌아오지 않았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고 동짓달에 애기무당은 혼자 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 다섯살 무렵에 청년이 돌아왔다 청년은 애기무당을 데리고 마을을 떠났다
 
  그 법당 자리에는 새 법당이 지어졌고 곁방이 있었다 노인은 그 곁방을 들여다보고 문지방에 앉아도 보았다 할머니 영정을 안은 아이를 앞세우고 마당을 한바퀴 돌고는 가죽나무 그늘 고샅길 돌아가면서 몇번이고 뒤돌아보았다
 
  그때 그 곁방에 숨어지내던 나도 암자를 떠난 지 십수년이 지났다 그 시절 내가 심은 수수꽃다리 다섯그루는 얼마나 자랐을까
 
청년과 애기무당은 손주 아이들을 여럿 둘 만큼은 행복하게 살지 않았을까요? 애기무당을 먼저 보내는 노인. 아이를 혼자 낳고 키웠을 눈 먼 애기무당은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하루하루 떨며 살지 않았을까요. 세상을 볼 수 없지만 아이를 살리고 키워야 한다는 절실함과 뜨거운 용기로 그 5년을 견뎠겠지요. 그 5년이 얼마나 어둡고 길었을까요? 5년이 지나서 찾아와 애기무당과 아이를 데리고 간 노인, 애기무당은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애기무당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청년, 수수꽃다리 다섯그루도 그 사랑 이상으로 자랐겠지요.
 
 
인간의 바깥
 
히틀러는 군함을 몰고 발트해를 순항하기보다
베르디와 바그너를 연주하는 걸 더 좋아했고
꽃과 자연풍경을 잘 그리는 화가였다
 
스딸린은 장갑차를 닮은 자신의 철잡차를 몰고
전선을 도는 일보다 어린아이들을 더 좋아했고
볼쇼이 오페라와 영화 광팬이었다
 
과거 이 나라 독재자는 총보다 붓을 잡는 걸 더 좋아했고
틈만 나면 붓글씨와 수채화 그리기에 몰입했다
 
홀로코스트 기획자들은 램브란트에 열광하고
베토벤을 수준급으로 연주했다
 
이웃 동네 사는 정치 사기꾼은 물 맑고 공기 좋은 강변
고향에 돌아오 술담배도 않고 나무와 꽃을 가꾸고
음악을 즐기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파탄내었다
 
저 맑은 물 좀 봐 저 나비 좀 봐
손에 잡힐 듯한 밤하늘 별들 좀 봐
이런 곳에 살면 마음이 저절로 맑아지겠지?
시가 저절로 나오겠지? 이 음악은 좀 들어봐
저 작품 좀 봐 영혼이 다 맑아지는 느낌이야
그런 탄성 들으면 나는 몸에 소름이 돋는다
 
그 탄성이 끝나기도 전에 이렇게 묻는다
이건 얼마짜리지? 여긴 한평에 얼마하지?
아름다운 것도 고귀한 것도 추악한 것도
구역질나는 것도 신성한 것도 꼴리는 것도 다
그 누구의 것이다 욕망의 대장에 등기가 된 것들이다
부처님도 언제부턴가 인간의 옆구리에서 탄생하고
거룩한 하느님도 인간의 갈비뼈를 뽑아 만든다
내 것이 아니므로 신성을 소유할 수 없고
내 것이므로 신성을 따를 필요가 없다
밖을 다 지우고 밖을 다 안으로 구겨넣고
밖이 증발하니 밖을 잃은 혁명은 구더기가 다 파먹었다
 
인간과 우주가 하나라고 해놓고 자연과 인간을 하나라고 해놓고
삶과 죽음을 하나라고 해놓고 한입에 다 털어넣었다
인류는 하나 세계는 하나 진리는 하나
하나라고 해놓고 한입에 다 털어 넣었다
센 놈이 다 털얺었다 고리대금업자가 다 털어 넣었다
제국의 제후들이 다 털어넣었다
우주도 얕은 접시물에 다 털어넣었다
 
창을 열고 내다봐도 안방이다 대문을 열고 나가도 안마당이다
저 밝은 불을 좀 꺼다오. 저 눈을 찌르는 조명 때문에
저 국경경비대 때문에 저 1퍼센트 제국의 십자군 때문에
저 세계라는 경계의 말뚝 때문에 나 때문에 나 때문에
밖을 볼 수 없다 밖을 내버려두라 침묵을 내버려두라
고요를 내버려두라 흘러가는 것을 내버려두라
바깥은 내가 더 태어나야 할 곳이다 나의 잠재적인 신체다
내버려두라 내버려두어야 하나가 된다
저 불을 좀 꺼다오 제발
저 눈알을 후벼파는 조명을
 
인간 본성의 모순과 이중성, 소유욕과 욕망 그리고 자연과의 단절. 벡무산 시인은 '인간의 바깥'에서 인간의 본성과 현대 사회의 모순을 인식하고, 진정한 내면의 평화와 자연과의 조화를 찾기를 촉구합니다.
 
 
우물
 
사람들 떠난 마을에 낡은 우물 하나 있다
두꺼운 시멘트 뚜껑으로 굳게 잠겨 있다
그곳에 달 하나 갇혀 있을 것만 같은
 
마을 고샅길 끝나는 곳 우물 속은 언제나
새벽처럼 어둑해서 정화수 정갈하게 길어 올리고
발소리 분주하게 쏴쏴 동이물 길어가고
여름 한밤중엔 여인들 나와 달빛 아래 몸을 씻던 곳
 
퍼올려도 퍼올려도 꼭 그만큼 찰랑거리던 수면
가만히 들여다보면 글썽이는 눈동자 속처럼 빨려들어
알 수 없는 깊이에 이어져
어딘가에서 할머니들 빌어 우리 목숩 점지하던
용왕님이 있을 것 같은, 그 물줄기가 용왕님인 듯 목숨처럼 받들던 우물
 
우물은 우리 깊은 잠 속으로도 흘러들어
시퍼런 물결로 와서 꿈을 씻으며 메아리 지던 아득한 밤들
 
지쳐 기진맥진한 밤에 돌아와 조용히 몸을 누이면
어느새 갈라진 목젓을 적시며 차오르고
자고 나면 또 찰랑찰랑 새살처럼 고여오고
깊은 상처들 풀 자라듯 기워내던 우물
 
다시 새벽 어둑한 깊이에 두레박을 내려야겠다
오랜 세월 풀 수 없었던 이 갈증을 내려야겠다
 
그런 갈증을 풀 수 있는 우물에 두레박을 내려봅니다. 창비시선 시집을 한 권 한 권 다시 읽거나 새로 읽으면서, 시집 한 권에서 심장을 뛰게 하거나 순간 멈추게 하는 3~4편의 시를 공유하려고 했습니다. 시평을 쓰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전문적인 식견을 가지고 있지도  않거니와 말입니다. 백무산의 <그 모든 가장자리>에서 4편의 시만 공유하기에는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