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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21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장석남, 창비시선 204 해남 들에 노을 들어 노을 본다 이 세상에 나서 처음으로해남 들 가운데를 지나다가들판 끝에 노을이 들어어찌할 수 없이서서 노을 본다노을 속의 새 본다새는내게로 오던 새도 아닌데 내게로 왔고노을은나를 떠메러 온 노을도 아닌데나를 떠메고 그러고도 한참을 더 저문다우리가 지금 이승을 이승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저 노을 탓이다이제는 이승을 이승이라고 부르지 말자고중얼거리며조금씩 조금씩 저문다해남 들에 노을이 들어 문득여러날 몫의 저녁을 한꺼번에 맞는다모두 모여서 가지런히잦아드는 저것으로할 수 있는 일이란가슴속까지 잡아당겨보는 일이다어쩌다가 이곳까지 내밀어진 생의 파란 발목들을덮어보는 일이다그렇게 한번 더퍼보는 것뿐이다내게 온 노을도 아닌데해남 들에 뜬 노을저 수천만 평의 무게로 내개로 와서내 뒤의 긴 그림자까.. 2024. 4. 26.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 이정록, 창비시선 404 우주의 놀이 천년 고목도 한때는 새순이었습니다.새 촉이었습니다.새싹 기둥을 세우고첫 잎으로 지붕을 얹습니다. 첫 이파리의 떨림을모든 이파리가 따라 하듯나의 사랑은 배냇짓뿐입니다.곁에서 품으로,끝없이 첫걸음마를 뗍니다. 사랑을 고백한다는 것은영원한 소꿉놀이를 하는 겁니다.이슬 비치는 그대 숲에서고사리손을 펼쳐 글을 받아내는 일입니다.곁을 스쳐간 건들바람과품에 깃든 회오리바람에 대하여. 태초의 말씀들,두근두근 옹알이였습니다.숨결마다 시였습니다.떡잎 합장에 맞절하며푸른 말씀을 숭배합니다. 새싹이 자라 숲이 됩니다.아기가 자라 세상이 됩니다.등 너머, 손깍지까지 당도한아득한 어둠을 노래합니다. 싹눈이 열리는 순간,태초가 열립니다. 거룩한우주의 놀이가 탄생합니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성장과 창조의 순환. 생명으.. 2024. 4. 25.
《봄비 한 주머니》 유안진, 창비시선 195 자격 초가을 햇살웃음 잘 웃는 사람, 민들레 홑씨 바람 타듯이, 생활을 품앗이로 마지못해 이어져도, 날개옷을 훔치려 선녀를 기다리는 사람, 슬픔 익는 집ㅇ마다 흥건한 달빛 표정으로 열이레 밤하늘을 닮은 사람, 모든 것은 사라지고 만다는 것을 알고, 그것들을 사랑하기에 너무 작은 작은 자신을 슬퍼하는 사람, 모든 목숨은 아무리 하찮아도 제게 알맞은 이름과 사연을 지니게 마련인 줄 아는 사람, 세상사 모두는 순리 아닌 게 없다고 믿는 사람, 몇해 더 살아도 덜 살아도 결국에는잃는 것 얻는 것에 별차이 없는 줄을 아는 사람, 감동받지 못하는 시 한편도 희고 붉은 피를 섞인 눈물로 쓰인 줄 아는 사람, 커다란 갓의 근원일수록 작다고 믿어 작은 것을 아끼는 사람, 인생에 대한 모든 질문도 해답도 자기 자신에게 던.. 2024. 4. 23.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신동엽, 창비시선 020 阿斯女 모질게 높은 성돌 모질게도 악랄한 채찍 모질게도 음흉한 술책으로 죄없는 월급쟁이 가난한 백성 평화한 마음을 뒤보채어쌓더니 산에서 바다 읍에서 읍 학원에서 도시, 도시 너머 궁궐 아래, 봄따라 왁자히 피어나는 꽃보래 돌팔매. 젊은 가슴 물결에 헐려 잔재주 부려쌓던 해늙은 아귀들은 그혀 도망쳐 갔구나. - 애인의 가슴을 뚫었지? 아니면 조국의 기폭을 쏘았나? 그것도 아니라면, 너의 아들의 학교 가는 눈동자 속에 총알을 박아보았나? - 죽지 않고 살아 있었구나 우리들의 피는 대지와 함께 숨쉬고 우리들의 눈동자는 강물과 함께 빛나 있었구나. 사월 십구일, 그것은 우리들의 조상이 우랄고원에서 풀을 뜯으며 양달진 동남아 하늘 고흔 반도에 이주 오던 그날부터 삼한으로 백제로 고려로 흐르던 강물, 아름다운 치맛.. 2024. 4. 20.
《 사이 》 이시영, 창비시선 142 어린 동화 아랫도리를 홀랑 벗은 아이가 젊은 엄마의 손을 이끌고 대낮의 쭈쭈바집으로 들어서고 있다 하느님이 뒤에서 방긋 웃다가 그 아이의 고추를 탱탱히 곧추세우자 젊은 엄마의 얼굴이 채양 사이로 빨갛게 달아 오른다 구례장에서 아침부터 검푸른 장대비가 줄기차게 오신다 천막 속에서 값싼 메리야스전을 걷다가 온 땅과 하늘을 장엄한 두 팔로 들었다 놓는 빗줄기를 하염없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서 있는 한 중년여인의 옆 얼굴이 빨갛다 오늘 같은 날 일요일 낮 신촌역 앞 마을버스 1번 안 등산복 차림의 화사한 할머니 두 분이 젊은 운전기사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여보시우 젊은 양반! 오늘같이 젊은 날은 마음껏 사랑하시구려. 그래야 산천도 다 환해진다우" 오늘같이 젊은 날, 마음껏 사랑하지요. 생업 통태 싸유..... 물.. 2024. 4. 19.
《니들의 시간》 김해자, 창비시선 494 당신의 말이 떨어질 때마다 나는 웃었다 참 곱다 고와, 봉고차 장수가 부려놓은 몸빼와 꽃무늬 스웨터 가만히 쓰다듬어보는 말 먹어봐 괜찮아, 복지에서 갖다주었다는 두부 두모 꼬옥 쥐여주는 구부려진 열 손가락처럼 뉘엿뉘엿 노을 지는 묵정밭 같은 말 고놈 참 야물기도 하지, 도리깨 밑에서 뜅 올라오는 알콩 같은 말 좋아 그럭하면 좋아, 익어가는 청국장 속 짚풀처럼 진득한 말 아아 해봐, 아 벌린 입에 살짝 벌어진 연시 넣어주는 단내 나는 말 잔불에 묻어둔 군고구마 향기가 나는 고마워라 참 맛있네, 고들빼기와 민들레 씀바퀴도 어루만지는 잘 자랐네 이쁘네, 구부려 앉아야 얼굴이 보이는 코딱지풀 같은 말 흰 부추꽃이나 무논 잠시 비껴가는 백로 그림자 같은 벼 벤 논바닥 위로 쌓여가는 눈 위에 눈 학교도 회사도 모르.. 2024. 4.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