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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49

《이 가슴 북이 되어》 이윤룡, 창비시선 0035 까치밥 금방 떨어질 것 같은 빨간 홍시감나무 꼭대기에 한두 개 놀며 오가며 어린 시절목젓 떨어지게 바라보던 까치밥돌팔매를 쏘고 싶지만 참았던 까치밥쏘아도 쏘아도 맞지 않던 까치밥죽어도 안 떨어지는 까치밥 훈훈하고 고운 마음씨가지금도 감나무에 매달려 있다. 옛날부터 감 따는 법을 칼로써 선포해했거나가르친 바도 없이 자연법이 생겨어떤 욕심장이 가난한 백성이라도까치들의 겨울 양식을 남겼으니 법은 무서운 것이 아니라어질고 순한 것이며없으면 안될 법은 저절로 씨가 떨어져울타리 안에, 동네 고샅에, 멧갓에이렇게 큰 법이 되어 열리는구나! 까치 까치 까치야,기다리는 봄동산기다리는 감격을언제 물고 오려는 것이냐,까치 까치 까치 까치 .....* 고샅: (시골) 마을의 좁은 골목길, 골목 사이  멧갓: 나무를 함부로 베.. 2024. 5. 25.
《나는 이 거리의 문법을 모른다》 고운기, 창비시선 0208 모국어   학교 들어가 한글 겨우 깨쳤을 때, 한달에 한번 아버지에게 가는 어머니 편지 쓰는 일은 내 몫아 되었다.  천부적인 사투리의 여왕인 어머니가 불러주는 말들이 국어 교과서의 철자를 능멸하는 것이어서, 국민학교 일학년 실력이 감당하기 여간 곤혹스지 않았지만, 전쟁통에 혼자 된 어머니가 만난 아버지는 무슨 선물인 양 아이 하나 두고 멀린 떠난 다음. 곧이곧대로 받아쓴 사투리로 장식된 편지를 읽는 일이 한순간 즐어움이었단다.  무정한 아버지.침 묻힌 힘으로 살아나는 연필심이 어머니 고단한 세월으 가시 같은 아픔으로 돌아서서 어린 손끝을 찌르곤 했던 걸 아시기나 했을랑가.  내가 만났던 첫 모국어. 어머니의 언어는 떠나간 아버지에게 전달되는 유일한 수단이었고, 이 편지는 아이에게 힘든 일이지만, 어머니.. 2024. 5. 19.
《벌거숭이 바다》 구자운, 창비시선 0008 龜裂(균열) 그건어떤 깎고 닦은 돌 面相(면상)에 龜裂(균열)진 금이었다.어떤 것은 서로 엉글어서 楔形(설형)으로 헐고어떤 것은 아련히 흐름으로 계집의 裸體(나체)를 그어놨다.그리고 어떤 것은 천천히 구을려또 裸體(나체)의 아랫도리를 풀이파리처럼 서성였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이러한 龜裂(균열)진 금의 아스러움이        그렇다, 이건 偶發(우발)인지 모르지만내 늙어 앙상한 뼈다귀에도 서걱이어때로 나로 하여금허황한 꿈 속에서 황홀히 젖게 함이 아니런가? 고,   구자운 시인은 1955년 서정주 시인의 추천으로 문단에 등단했습니다. 모더니즘이 팽배했던 1950년대 문단에서 한국 전통시의 서정성 회복을 위해 애썼다고 합니다.1960년을 기점으로 이후 탐미적인 시, 언어적 세련미 추구 경향에서 현실적.. 2024. 5. 9.
《어두워진다는 것》 나희덕, 창비시선 205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그 복숭아나무 곁으로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흰꽃과 분홍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멀리로 멀리로만 지났쳤을 뿐입니다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눈부셔 분부셔 알았습니다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그 여러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나희덕 시인은 흰꽃과 분홍꽃을 동시에 피우는 복숭아나무를 보며 사람들의 마음 속 깊이 숨겨진 수 많은 감정.. 2024. 5. 4.
《사월에서 오월로》 하종오, 창비시선 43 마음 마음먹은 대로 몸을 변신시킬 수 있다면상계동 골짜기 맑은 물이 되어서부모들 행상 나간 뒤 비탈진 골목에서흙 만지며 노는 아이들 깨끗이 씻어주고 봄날엔 홀연히 많은 고액권이 되어서삭월세 사는 주민들의 전세금으로혹은 너른 땅을 사서 골고루 나눠주어한 채씩 집을 짓게 하고겨울날엔 옷과 밥이 되어따뜻하게 지내게 해주고 그러나 그 일을 하기 전에 오늘밤에는중동취업을 꿈꾸는 남편들에게입사서류가 되어 배달되거나포장마차 마련을 꿈꾸는 아내들에게리어카와 연탄불이 되어 찾아가거나학교 못 다니는 쓸쓸한 소년소녀에게책이 되어 찾아가 공부하게 하고 그러나 마음먹는 대로 몸을 변신시킬 수 있다면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한나절 싸우고 우는 아이들에게장난감이 되어 함께 놀다가사랑이 되어 포근히 안아주다가 하종오 시.. 2024. 5. 2.
《꿈의 페달을 밟고》 최영미, 창비시선 175 그 여름의 어느 하루   오랜만에 장을 보았다. 한우 등심 반근, 양파, 송이버섯, 양상추, 깻잎, 도토리묵, 냉동 대구살, 달걀..... 종이쪽지에 적어간 목록대로 쇼핑 수레에 찬거리를 담노라면 꼭 한두개씩 별외로 추가되는 게 있게 마련이다. 아, 참기름이 떨어졌지. 저기 마요네즈도 있어야 샐러드를 만들겠군. 그렇게 소소한 생활의 품목들을 빠짐없이 챙기는 동안만은 만사를 잊고 단순해질 수 있다. 불고기를 재고 도토리묵을 무쳐야지, 대구가 적당히 녹았을 때 밀가루를 뿌려야 하니 중간에 어디 들르지 말고 빨리 집으로 가야지. 샐러드에 참치를 넣을까 말까. 적어도 이것과 저것 중에 하나를 택할 자유가 내 손에 달려 있을 때, 망설임이란 늘 즐거운 법이다.  행복이란 이런 잠깐 순간에 있는 게 아닐까? 양손에.. 2024. 5.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