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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시선79

《벌거숭이 바다》 구자운, 창비시선 0008 龜裂(균열) 그건어떤 깎고 닦은 돌 面相(면상)에 龜裂(균열)진 금이었다.어떤 것은 서로 엉글어서 楔形(설형)으로 헐고어떤 것은 아련히 흐름으로 계집의 裸體(나체)를 그어놨다.그리고 어떤 것은 천천히 구을려또 裸體(나체)의 아랫도리를 풀이파리처럼 서성였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이러한 龜裂(균열)진 금의 아스러움이        그렇다, 이건 偶發(우발)인지 모르지만내 늙어 앙상한 뼈다귀에도 서걱이어때로 나로 하여금허황한 꿈 속에서 황홀히 젖게 함이 아니런가? 고,   구자운 시인은 1955년 서정주 시인의 추천으로 문단에 등단했습니다. 모더니즘이 팽배했던 1950년대 문단에서 한국 전통시의 서정성 회복을 위해 애썼다고 합니다.1960년을 기점으로 이후 탐미적인 시, 언어적 세련미 추구 경향에서 현실적.. 2024. 5. 9.
《國土(국토)》 조태일, 창비시선 0002 어머님 곁에서 온갖 것이 남편을 닮은 둘쨋놈이 보고파서호남선 삼등 야간열차로육십 고개 오르듯 숨가쁘게 오셨다. 아들놈의 출판기념회 때는푸짐한 며느리와 나란히 앉아아직 안 가라앉은 숨소리 끝에다가방울방울 맺히는 눈물을내게만 사알짝 사알짝 보이시더니 타고난 시골솜씨 한철 만나셨다山一番地(산일번지)에 오셔서이불 빨고 양말 빨고 콧수건 빨고김치, 동치미, 고추장, 청국장 담그신다.양념보다 맛있는 사투리로 담그신다.          엄니, 엄니, 내려가실 때는요         비행기 태워드릴께,         안탈란다, 알탄란다, 값도 비싸고         이북으로 끌고 가면 어쩌 게야? 옆에서 며느리는 웃어쌓지만나는 허전하여 눈물만 나오네. 1971년 작품. 1968년에 태어난 사람은 조태일 시인의 가 찡하게 .. 2024. 5. 9.
《農舞(농무)》 신경림, 창비시선 0001 農舞(농무)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레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1971년 대한민국의 총인구는 약 3,260만명이었으며, 농촌 인구는 .. 2024. 5. 9.
《그럴 때가 있다》 이정록, 창비시선 476 뱁새 시인   수컷은 보폭이 커야지.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면 가랑이 찢어진다는 말 알잖여? 그게 나쁜 말이 아녀. 자꾸 찢어지다보면 겹겹 새살이 돋을 거 아닌감. 그 새살이 고살 거시기도 키우고 가슴팍 근육도 부풀리는 거여. 가랑이가 계속 찢어지다보면 다리는 어찌 되겄어. 당연히 황새 다리처럼 길쭉해지겄지. 다리 길어지고 근육 차오르면 날개는 자동으로 커지는 법이여. 뱁새가 황새 되는 거지. 구만리장천을 나는 붕새도 본디 뱁샛과여. 자네 고향이 황새울 아닌가? 그러니께 만해나 손곡 이달 선생 같은 큰 시인을 따르란 말이여. 뱁새들끼리 몰려댕기면 잘해야 때까치여. 그런데 수컷만 그렇겄어. 노래하는 것들은 다 본능적으루다 조류 감별사여. 시란 게 노래 아닌감? 이리 가까이 와봐. 사타구니 새살 좀 만져보게... 2024. 5. 8.
《슬픔이 택배로 왔다》 정호승, 창비시선 482 새해의 기도 올해도 저를 고통의 방법으로 사랑해주세요저를 사랑하시는 방법이 고통의 방법이라는 것을결코 잊지 않도록 해주세요그렇지만 올해도 견딜 수 없는 고통은 허락하지 마소서 올해도 저를 쓰러뜨려주세요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쓰러뜨리신다는 것을 이제 아오니올해도 저를 거침없이 쓰러뜨려주세요그렇지만 다시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쓰러뜨리지는 말아주소서 올해도 저를 분노에 떨지 않도록 해주세요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분노하기보다기도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세요그렇지만 분노를 가라앉힐 수 없을 정도로억울한 일은 당하지 않게 하소서 올해도 저에게 상처 준 자들을 용서하게 해주세요용서할 수 없어도 미워하지는 않게 해주세요그렇지만 용서할 수 없을 정도로 상처받지 않게 해주소서무엇보.. 2024. 5. 6.
《어두워진다는 것》 나희덕, 창비시선 205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그 복숭아나무 곁으로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흰꽃과 분홍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멀리로 멀리로만 지났쳤을 뿐입니다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눈부셔 분부셔 알았습니다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그 여러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나희덕 시인은 흰꽃과 분홍꽃을 동시에 피우는 복숭아나무를 보며 사람들의 마음 속 깊이 숨겨진 수 많은 감정.. 2024. 5.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