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시선79 《맑은 날》 김용택, 창비시선 0056, 1986년 8월 섬진강 22 - 누님의 손끝 누님. 누님 같은 가을입니다. 아침마다 안개가 떠나며 강물이 드러나고 어느 먼 곳에서 돌아온 듯 풀꽃들이 내 앞에 내 뒤에 깜짝깜짝 반가움으로 핍니다. 누님 같은 가을 강가에 서서 강 깊이 하늘거려 비치는 풀꽃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누님을 떠올립니다. 물동이를 옆에 끼고 강으로 가는 길을 따라 강물에 이르르면 누님은 동이 가득 남실남실 물을 길어 바가지물 물동이에 엎어 띄워놓고 언제나 그 징검다리 하나를 차지하고 머리를, 그 치렁치렁한 머리채를 흘러가는 강물에 풀었었지요. 누님이 동이 가득 강물을 긷고 머리를 감는 동안 나는 물장난을 치며 징검다리를 두어 간씩 힘껏힘껏 뛰어다니거나 피라미들을 손으로 떠서 손사래로 살려주고 다시 떠서 살려주며 놀다가 문득 누님을 쳐다보면 노을은.. 2024. 6. 8. 《참깨를 털면서》 김준태, 창비시선 0014, 1977년 7월 참깨를 털면서 산그늘 내린 밭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보아하니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지만어둬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나는한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한다.世上事(세상사)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이참깨를 털어대는 일엔 희한하게 있는 것 같다.한번을 내리쳐도 셀 수 없이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맹이들都市에서 십년을 가차이 살아본 나로선기가막히게 신나는 일인지라휘파람을 불어가며 몇 다발이고 연이어 털어낸다.사람도 아무 곳에나 한번만 기분좋게 내리치면참깨처럼 솨아솨아 쏟아지는 것들이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털다가"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되느니라"할머니의 가엾어하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 젊은 시인은 더 많은 힘을 주어 빨리 일을 끝내려고 합니다. 힘껏 내리칠.. 2024. 6. 7. 《섬진강》 김용택, 창비시선0046, 1985년 1월 詩人(시인) 金龍澤(김용택)씨 수상. 6회 金洙映(김수영) 문학상 제 6회 金洙映(김수영) 문학상 수상자로 시인 金龍澤(김용택)씨 가 선정되었다. 수상작은 시집 「맑은 날」(창작사刊(간)). 전북 임실군 덕치면에서 국민학교 교사로 재직 중인 金(김)씨는 1982년 창작과 비평사의 「21인 신작시집」에 시 「섬진강1」 등을 발표하며 데뷔한 신예 시인이다. 작년 첫 시집 「섬진강」을 냈으며, 지난 8월 제 2시집 「맑은 날」을 출간했다. 그의 시는 『시대 착오적인 면이 없지 않으나 관념을 배제하고 체험에 뿌리내린 긍정적인 삶의 자세와 청정한 서정성이 돋보인다』는 評(평)을 받았다. 지난 81년 도서출판 民音社(민음사)와 유족들이 공동제정한 金洙映(김수영) 문학상은 그동안 鄭喜成(정희성), 李晟馥(이성복.. 2024. 6. 5. 《키스를 원하지 않는 입술》 김용택, 창비시선 0360, 2013년 4월 달콤한 입술 작은 물고기들이 등을 내놓고 헤엄을 친다보리밭에서는 보리가 자라고 밀밭에서는 밀이 자라는 동안산을 내려온 저 감미로운 바람의 발길들,달빛 아래 누운 여인의 몸을 지난다.달콤한 키스같이 전체가 물들어오는, 이 어지러운 유혹의 입술,오! 그랬어.스무살 무렵이었지.나는 날마다 저문 들길 끝에서 있었어.어둠에 파묻힌 내 발목을 강물이 파갔어.비가 오고, 내 몸을 허물어가는 빗줄기들이 강물을 건너갔어. 그 흰 발목들,바람이 불면 눈을 감고 바람의 끝을 찾았지.얼굴을 스쳐지나가는 단내 나는 바람!나는 울었어. 외로웠다니까. 너를 부르면 내 전부가 딸려갔어.까만 돌처럼 쭈그려앉아 눈물을 흘렸어.그리움을 누르면 피어나던 어둠 속에 뜨거운 꽃잎들,말이 되지 않는 말들이 나를 괴롭혔어. 집요했어.바위 뒤 순한.. 2024. 6. 2. 《깨끗한 희망》 김규동, 창비시선 0049 유모차를 끌며 그 신문사 사장은변변치 못한 사원을 보면집에서 아이나 보지 왜 나오느냐고 했다유모차를 끌며 생각하니아이 보는 일도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기저귀를 갈고 우유 먹이는 일목욕 시켜 잠재우는 일은책 보고 원고 쓸 시간을군말 없이 바치면 되는 것이지만공연히 떼쓰거나마구 울어댈 때는 귀가 멍멍해서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이 되니이 경황에 무슨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느냐신기한 것은한마디 말도 할 줄 모르는 것이때로 햇덩이 같은 웃음을굴리는 일이로다거친 피부에 닿는 너의 비둘기 같은 체온어린것아 네개 있어선모든 게 새롭고 황홀한 것이구나남북의 아이들을 생각한다아무것도 모른 채 방실거리고 자랄미국도 일본도 소련도핵폭탄도 식민지도 모르고 자랄통일조선의 아이들을 생각한다이 아이들 내일을 위해선우리네 목숨쯤이야 .. 2024. 6. 1. 《이 가슴 북이 되어》 이윤룡, 창비시선 0035 까치밥 금방 떨어질 것 같은 빨간 홍시감나무 꼭대기에 한두 개 놀며 오가며 어린 시절목젓 떨어지게 바라보던 까치밥돌팔매를 쏘고 싶지만 참았던 까치밥쏘아도 쏘아도 맞지 않던 까치밥죽어도 안 떨어지는 까치밥 훈훈하고 고운 마음씨가지금도 감나무에 매달려 있다. 옛날부터 감 따는 법을 칼로써 선포해했거나가르친 바도 없이 자연법이 생겨어떤 욕심장이 가난한 백성이라도까치들의 겨울 양식을 남겼으니 법은 무서운 것이 아니라어질고 순한 것이며없으면 안될 법은 저절로 씨가 떨어져울타리 안에, 동네 고샅에, 멧갓에이렇게 큰 법이 되어 열리는구나! 까치 까치 까치야,기다리는 봄동산기다리는 감격을언제 물고 오려는 것이냐,까치 까치 까치 까치 .....* 고샅: (시골) 마을의 좁은 골목길, 골목 사이 멧갓: 나무를 함부로 베.. 2024. 5. 25. 이전 1 ··· 5 6 7 8 9 10 11 ··· 1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