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22 - 누님의 손끝
누님.
누님 같은 가을입니다.
아침마다 안개가 떠나며
강물이 드러나고
어느 먼 곳에서 돌아온 듯
풀꽃들이 내 앞에 내 뒤에
깜짝깜짝 반가움으로 핍니다.
누님 같은 가을 강가에 서서
강 깊이 하늘거려 비치는
풀꽃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누님을 떠올립니다.
물동이를 옆에 끼고
강으로 가는 길을 따라
강물에 이르르면
누님은 동이 가득 남실남실 물을 길어
바가지물 물동이에 엎어 띄워놓고
언제나 그 징검다리 하나를 차지하고
머리를, 그 치렁치렁한 머리채를 흘러가는 강물에 풀었었지요.
누님이 동이 가득 강물을 긷고
머리를 감는 동안
나는 물장난을 치며
징검다리를 두어 간씩 힘껏힘껏 뛰어다니거나
피라미들을 손으로 떠서
손사래로 살려주고
다시 떠서 살려주며 놀다가
문득 누님을 쳐다보면
노을은 강을 따라 앞산을 오르고
누님은 머리를 다 감고
고개를 뒤로 젖혀 머리채를 흔들어 강바람에 말렸지요.
저 앞의 우뚝 큰 산의 솟구치는 산굽이 돌아오는
맑고 고운 강물 속에
누님의 모습은
불길처럼 타는 노을과 함께
활활거렸읍니다.
그런 누님의 모습을 올려다보며
내 가슴은 쿵쿵 뛰었었읍니다.
강바람에 하늘거리돈 누님의 검정치망허 꽃자주고름
그 고운 머릿결이
차곡차곡 내 가슴 오단거애 서늘히 쌓이곤 했습니다.
누님,
누님은 붉은 댕기를 입에 물고
머리를 따 내리면서
나를 보며 가을 햇빛같이 쓸쓸히
때론 환하게 웃어주곤 했습니다.
누님은 머리를 다 따 내려 묶고
또아리를 곱게 빗은 머리 위에 가만히 얹고 앉아
또라리 끈을 입에 물고
눈 내리갈아
물동이를 이었읍니다.
물동이를 이고 징검다리를 건너뛸 때마다
남실거리던 물이 넘쳐 흘러내리면
누님은 이마에서 눈썹에서 물을 훔쳐 뿌리곤 했읍니다.
누님의 그 눈 내리깐 고운 청춘의 눈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뿌리는 손길을 따라가다 보면
누님의 손끝에선
저기 저런 풀꽃들이 강에 피고
다른 풀꽃이 지고
때론 작은골 큰골 붉은 단풍이 물들고
앞산 위에 반작이는 샛별이 되고
초가 지붕 위에
하얀 박꽃이 피어났읍니다.
강길이 다 끝날 때까지
누님은 그렇게 우리 마을 곳곳을 곱게도 물들이며
걸었읍니다.
전쟁이 끝난 어느 가을날이었읍니다.
그날따라 누님은
일찍 물을 길어놓고
노을보다 먼저 징검다리를 건너
강변에 가 앉았읍니다.
누님은 풀꽃들이 만발한 강변에 앉아
강물을 바라보며
무심히 풀잎들을 뜯어
잘근잘근 깨물었읍니다.
강바람에 쓰러지고 일어나는 풀잎들,
풀꽃들 하늘거리는
그 깊디깊은 눈으로
저 강굽이 끝을 보며
"그이는 꼭 살아 있을 거요
그이는 꼭 올 거여" 하셨지요
누님,
누님이 그때 그 말을 중얼거리며
풀을 뜯어 흩뿌리며
벌떡 일어나 화난 사람처럼 강을 건넜었는지
나는 몰랐었읍니다.
다만,
그해 가을이 이 가을처럼 가고
겨울이 겨울처럼 온
어는 눈 내리던 밤
나는 잠결에 아버님의 진노하신
목소리에 잠이 깨었고
"그놈은 오지 않는다. 인자 그놈은
잊어부러 ..... 그놈은 그놈은 ......." 하시던 고함소리와
누님의 가느다란 흐느낌 소리를 따라 내리는
눈 쌓이는 소리를 나는 숨죽여 들었습니다.
누님,
누님은 그날 밤내 뒤척이고
눈은
들먹이는 산의 어깨를 따라 쌓이고
강에 내렸읍니다.
누님,
누님이 보여주었던
그 바람 타는 강변 풀잎들이
지금도 저렇게
어쩌자는 것인지 바람 속에 흔들거립니다.
풀꽃들이 넘어졌다가 일어나며
"그이, 그이는 꼭 올 거요
꼭 올 거여" 하는 것 같습니다 누님,
누님은 이렇게 가는
어느 늦가을 살얼음 깨고
시린 물소리를 따라갔습니다.
누님이 한번 들려주셨던
그 그이 그이를 지금 나도 생각합니다.
내 얼마나 사랑하는요.
해 지면 풀꽃들이 한없이 몰려와
저문 강에 몸을 씻고
더욱 황홀하게 드러났다
서늘히 식던 그 자태들을,
한 꽃이 지며 다른 한 꽃에
꽃을 넘겨주고 가던
그 다정한 계절의 손짓들을,
아무도 오지 않는
내 청춘의 저문 물가에
우두커니 서서
저물어오는 강물에
내 얼마나 오래오래
내 외로움을 적셔
늦꽃을 피웠옸는지요.
누님,
나는 누님의 강물과
내 어린 강물이 보고 싶을 때면
물소리를 따라 강물로 가곤합니다.
문소리를 따라 가장 낮게 가라앉아 흐를 때꺼자 따라가면
이 세상이 이 세상으로 소중하게
다가와 내 몸에 감겨옵니다.
사랑이 크면 외로움이 깊다는
그런 말들을 믿을 때쯤
나는 물소리를 따라가며
물소리 끝에 뼈가 시렸으나
그런 말들을 계절처럼 수정해가면서
사랑이 크면 클수록
세상의 참모습이 바로 보이고
해야 할 일만 보임을 알게 되기까지
나는 누님이 머리를 감고 일어서면
언제나 싱싱하게 물기에 젖어 있던
징검다리를 찾아가
어느 것 하나 버릴 수 없는 이 세상의 물소리 속에서
피비린 전쟁과 두 동강난 조국의 아픔을
그리고 용기와 사랑을 보았읍니다.
그리고 삶과 죽음
이별과 만남,
내 삶의 깊이와 폭을.
누님,
누님이 바라보며
그이를 기다렸던
저 슬픔과 괴로움과 그리움과 사랑의 여울지는 강물을
나도 바라봅니다.
아늑하고 평안한
바라봄의 저 강물을.
누님,
누님이 나를 데리고 강 건너 가
바라에 쓰러지고 일어나는
바람 타는 풀잎들을 보여주었던
그 아름다운 날의 중얼거림,
그이 그이는 꼭 온다는
그 믿음이 세월을 따라 곧 내 믿음이 됩니다.
고객 들어
우뚝 일어서는 저 어두워져오는
산속을 보면
어둠 속에 하얀하던
누님의 손,
그 손끝이 어둠을 뿌리며
부르며 하늘거립니다.
그 손끝을 따라
오늘도 강에 꽃들이 피어납니다.
누님,
그이는
이쪽도 저쪽도 아닌
저기 저 물같이
들를 곳 다 들려
우리 땅을 골고루
적셔 채워주며
이 가을과 저 멀고 긴 어둠의 겨울을 뚫고
봄을 여는 물굽이로
저 산굽이를 돌아
눈부시게 올 것입니다.
그 힘찬 희망의 날에
우리 그리운 누님의 고운 강변에
풀꽃들이 만발하고
역사의 꽃수레를 끌고 가는 씩씩한
사내들을 맨발로 따라가는
내 누이들의 숨김없는 싱그러운 웃음소리들이
산에 산산이 울려
강에 강강에 울려
누님의 손길을 따라
저 깊고 어두운 산과 강이
훤하게, 훤하게
꽃같이 훤하게
열릴 것입니다.
그러면 누님
이 서러운 강물을 쓸어안으며
저 하늘 보며
곱게곱게 쓰러지십시오 누님.
아침 출근길, 다시 읽는 <맑은 날> 눈물이 핑 돌고 목이 메여옵니다. 잠시 시집을 덮고 감정을 추스려 봅니다. 어머니와 누님과 섬진강과 그리고 김용택 시인...... 우리 할머니, 할아보지, 아버지, 어머니의 고단했을, 그리고 고단한 삶.
섬진강 23 - 편지 두 통
어머님께
엄마 보고 싶어요.
바쁜 철이 되어가니
겨울에 그렇게나마 고와진 손발
또 거칠어지겠군요
엄마 딸
곧 직장 갖게 될 것 같아요
엄마
나 학교 못 다녀도 괜찮아요
너무 걱정 마시고
몸 편하세요
어머니 딸이 된 것
그리고 이렇게 맘이 크게 된 것 감사드립니다.
엄마
집에 갔다가 올 때마다
동구 밖까지 짐 이오더 주시고
오래오래 서 계시다가
징검다리 건너
밭에 드시던
어머니 뒤돌아보면
어머니, 어머니 하며 들길 걸을 때
차마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고
등뒤 물소리에
목이 메어
산천이 뿌연해지곤 했어요
엄마
이 세상 사람들에게
좋은 딸이 될께요
아름다운 하늘 아래
밭 매고 계실 엄마에게
사랑하는 엄마의 작은 딸
복숙 올림.
딸에게
복숙아
니 핵교 그만둔 것
징검다리를 건너다가도
밭을 매다가도
그냥 우두커니 서지고
호미 끝아 돌자갈에 걸려
손길이 떨리고
눈물이 퉁퉁 떨어져
콩잎을 다 적신다.
이 애미가 이렇게
가슴이 미어지는디
너사 올매나 가슴이 아프겄냐
허지만, 너만 그런 것도 아닌가 보드라
너도 인자 돈벌어
시집 가서 잘 살아라
복숙아
논에 들고 밭에 들어 일헐 때
그냥 너그덜 못 입히고 못 멕이고,
언제 너그들 가욋돈 한번 준 적 있었냐.
그렇게 가르친 걸 생각하면
꼭 죽겄다.
그냥, 공일날만 돌아오면 걱정이 되고
고추 팔고 삼베 팔고 니 애비 모르게
온갖 곡식 되로 말로 퍼내어
알탕갈탕 침이 마르게 돈 주고
이 고살 저 고살
발이 닳아지고
입이 닳아지게
돈 꿔다 주고 그래도
너그들 시무룩하게
쌀자루 메고 김치단지 들고 가는 꼴을
밭머리 들다 바라보면
너그 가슴이야 오죽들 헜겄냐만
내 가슴은 그냥 찢어졌단다
복숙아
이 몸뚱아리가 닳아지고 찢어질 것 같은 것이었으면
진즉 다 닳아지고 찢어져버렸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너그들 방학 때 명절 때
끄릿끄릿 줄줄이 집에 오는 것이
곡석들 잎 사이로 보이면
내 자석들, 내 자석들 하며
손길이 빨라지고
내 삭신이래도 떼어 주고 싶었니라
복숙아
니 일 니가 비문히 알아서 하겄냐만
너무 조급히 맘묵지 말아라
멀쩡한 생사람들이 죽고도
다들 살드라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오손도손 우애 있게
사는 것이 질이여
객지생활하는 너그들 다
그냥 몸이나 성혀야 헐 텐디
생각하묜 할수록
꼭 짠혀 죽겄다.
복숙아
바라보면 첩첩 산이요
돌아보면
굽이굽이 살아온 물이구나
하루가 다르게
저 앞산 앞내가 푸르러져오고
농사철은 코앞에 닥쳐오는디
홀몸으로 걱정이 저 앞산 같다만
어치고 어치고 또 되겄지야
일자리 잽히면 한번 댕겨가그라
산중에서 못난 니 에미가.
산이 참 곱게도 물들고
강이 참 맑기도 허다.
갈현2동에 위치한 역촌중앙시장. 1970년 문을 열고 51여년 영업을 하다가 2024년 문을 닫고 역촌맨션과 함께 주상복합건물로 재개발 들어간 시장. 재산을 몽땅 날리고 서울로 올라와서 살림 살던 어머니가 처음 숙녀복 가게를 역촌중앙시장 2층에 열었답니다. 예닐곱살에 두 살 터울 동생들을 데리고 어머니를 찾아가면 그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다시는 시장에 오지말라고 역정을 내시곤 했었는데, 그 땐 이해를 못했답니다.
어머니
어머니
오늘도 당신은
한평생 땅을 밟아
두꺼워진 발바닥이
뜨거운 자갈에 닿아 뜨겁고
흙 속애 손 넣어 씨 덮으면
마디마디 굵어잔 손가락이 뜨거운
땅 훈짐으로
흙 냄새 훅훅 숨이 턱에 차도
숨 돌릴 새 없는
흙먼지 속에
번득이는 호미 끝으로
불덩어리같이 가문 밭,
당신의 온몸 구석구석 긁고 찍어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려
곡식들을 키우고
오금 저리는 몸 펴
숨 몰아 밭 가에 토하다
얼굴 쓰다듬으면
흙먼자 쌓여 걸리는
피멍든 원한과 슬픔의 저 깊고 깊은 세월
오, 어머니
불 닿으면 타버릴
오뉴월 장작개비처럼 마른 당신의 몸은
살찔 일 하나 없는
억압과 착취의 긴 농민으 역사
그 숨 막히는
뜨거운 흙바람 속을
노동으로 헤쳐 뚫고
어둔 세상을 밝혀온
검푸른 산 속의 한 뙈가 밭,
콩 심으면 콩 나고
팥 심으면
팥 훤하게 자라는
저기 저 불볕 속
뜨거운 땅입니다.
어머니
성한 곳 하나 없이
잘라지고 찢긴 생살 틈마다
흙 든 당신의 몸은
칼끝도 총알도
그 어떤 압제의 쇠붙이도
다 받아 썩여
곡식을 키우는 흙,
써도 써도 닳아지지 않는
헛살 없는 당신의 눈물겨운 흙빛 몸은
우리 그리운 민주와 민중 민족통일의 해방된 땅,
일하는 사람들의 세상으로
피 어린 총칼의 숲을 헤쳐 나가는
저 선봉에 나부끼는 투쟁의 깃발입니다
인간해방의 완성된 땅에
눈부시게 펄럭일
피와 땀과 눈물로
이 땅에 몸 바쳐온
당신의 몸은
기나긴 어둠의 역사를 밝혀온
햅쌀같이 눈이 부신
당당한 노동의 깃발,
민중해방의 깃발입니다 어머니.
김용택 시인의 시들을 읽다보면 한자어가 극히 제한적으로 읽힌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한자어를 넘어서 외래어와 국적 불명의 신종어에 뭍혀 싸는 시절, 시인의 시 하나 하나 읽으며 영과 마음과 몸이 맑아지고 밝아집니다.
민중해방의 깃발, 김용택 시인의 시 가운데 민족통일의 해방된 땅, 민중해방의 깃발과 같이 직접적인 낱말을 언급한 경우가 드문데 매우 이례적인 시입니다. 굳이 이런 낱말이 쓰이지 않아도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겠지만, 젊은 날 가슴을 띄게 했던 낱말이지만, 시와 팜플렛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해마다 봄은 오지만, 봄은 해마다 새삼스럽고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우리는 아직도 자연의 봄과 사람의 봄을 한번도 일치시키지 못해서일 터이다. 꽃이 꽃 같고 물소리가 물소리 같고 곡식이 곡식 같고 사람이 사람으로 대접받는 사람다운 세상을 한번도 만끽하지 못해서일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 땅에 와야 할 진정한 봄을 한순간도 포기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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