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면, 좋겠어요>는 김용택 시인이 72세(우리 나이)였던 해에 출간한 책입니다. 이 책은 시와 산문 사이에 다리를 놓고 있습니다. 대전 유성의 <버찌 책방> 책방지기(주인장)가 시인을 만나러 간다고, 사인을 받아 올테니 그 때 책을 찾아가라고 했답니다. '해 져요 오늘 할 일은 다 하셨나요 나는 산 아래 있어요' 글 귀위 위에 제 이름과 날짜를 친필로 써주셨습니다.
옛날 시를 찾았다
아내가 맛있는 김치를 담갔다.
돌나물과 물김치하고 국물이 찰박한 물김치를 담갔다.
맛있다.
병원에 갔다.
밀려서 두 시간 동안 병원에 앉아 있었다.
짜증이 여기저기에서 슬슬 기어나와
내 얼굴로 몰려드는 것을 느꼈다.
얼굴을 자꾸 고쳤다.
오늘은 옛날 시를 몇 편 더 찾았다.
알고 보니, 내가 환갑 무렵에 쓴 동네 이야기들이다.
딸이 이 시는 영화 같다고 한다.
「가을」과 「아롱이 양반」은 새로 쓰고
「보리밭」은 다시 찾고 「금화」, 「청산」이 좋았다.
새로 찾은 「보리밭」이 좋았다.
「금화」도 좋다.
인이의 책을 읽고 있을 때
인이에게서 문자가 왔다.
선생님이 사는 곳은 평화롭겠지요?
나는 너무 평화로워 평화가 아프단다, 고 자문했다.
나의 평화 뒤에 어둔 그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 일상은 평화롭다.
나도 사회인이다.
인세 왔다.
상당히 많이 왔다.
좋다.
김용택 시인도 때때로 짜증을 내는군요. 시인의 글에서 평범한 삶의 소중함과 평화로운 듯 보이지만 그 속에 숨겨진 내면의 갈등, 그리고 평화 뒤에 숨겨진 어둠. 그리고 상당히 많이 온 인세에 인색하지 않은 사회인. 자신의 삶을 깊이 성찰하며 일상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삶, 그런 삶을 살고 싶습니다.
달이 내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날 아침
아침에 눈을 떴더니
달이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깊은 산속에서 뻐꾹새가 오늘 처음 울었습니다.
어제부터 뒷산 당산나무 파랑새가 조용해졌습니다.
강변 풀잎 끝에 이슬들이 영롱합니다.
꾀꼬리는 조용합니다.
며칠되었지요.
물까치가 날아다니기는 하지만
전깃줄에 앉아 온순해졌습니다.
뒤란 감나무 까치도 조용하구요.
딱새는 아직 자나봅니다.
뱁새가 이슬 맺힌 풀잎 사이로 날아가는지 풀잎이 흔들리고
이슬 몇 방울이 굴러떨어집니다.
며칠 동안 보았는데,
뱁새기 버드나무 가지 사이에
집을 짓는 모양입니다.
입 가득 마른 풀잎과 새털들을 물고 다닙니다.
그 버드나무 가지 사이로 오늘 아침
어치가 날아들었습니다.
어치는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자리를 옮기더니
어딘가로 숨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혹시 뱁새 둥지에 알을 낳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제부터 앞 강 원앙이
새끼 아홉 마리를 데리고 돌아다닙니다.
상당히 컸어요.
물살이 크게 일어 자세히 보았더니, 원앙이었지요.
오늘 아침에는 어른 오리들이 놀던 바위 위에 앉아
몸에 기름을 바르고 엄마 곁에 오불오불 모여서
어른같이 고개를 날개 위에 조용히 얹고
고요히 쉬고 있었습니다.
새끼들의 어린 고요도 제법입니다.
꾀꼬리는 아직 강으로 물 먹으러 나오지 않았습니다.
참새 한 쌍이 물싸리 죽은 나뭇가지에 앉아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어도 날아가지 않았어요.
사이가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살금살금 한 발 한 발 가까이 다가가도 날지않고
얼굴을 마주보고 있었으나
별 감정 없어 보였습니다.
아침부터 싸웠을까요.
방향이 다르게 날아갔습니다.
말다툼 이상인가봐요.
시인은 유튜브 볼 새가 없겠어요. 강과 숲에서 만나는 새들을 보느라 말입니다. 그런데, 김용택 시인님 말다툼도 말다툼 그 이상으로 마음 상하지 마셔요.
이러다가 우리 싸우고 말지
여보, 상처 씻은 것
저기다가 두고
이 빵 좀 들고 따라와요.
빵 거기다가 두고
이불을 걷어야겠지요.
그걸 개서
이불장에 넣으세요.
당신 바지랑
내 원피스 걷어서
옷장에 걸어주세요.
병에 물을 채워 냉장고에 넣어야겠는데요.
가만히 있어봐,
여보 탁자 좀 정리해야겠어요.
저기 저 옷 창고에 갖다두고 오면서
여름옷 챙겨놓은 것 가져오세요.
여보, 근데 미안하지만
커피 좀 타오면 안 될까요.
프림 안 들어간 걸로요.
어? 파리닷!
근데 여보, 나 숨 좀 쉬면
안 될까?
알았어요.
그럼 숨쉬고
이 빨래 좀 널어주세요.
그냥 웃지요, 이 글을 읽으면서.....그러다 더 다정해지 겠지요, 싸우지 마셔요.
이런 거 가지고
여보, 삼십분 있으면 햇빛이 다 가니까
큰집에 당신 바지 널어놨거든요,
걷어다가 집 뒤란에 당신 옷 걸어둔 것
걷어 같이 개고
여기 빨래 다 말랐거든요,
정리하고
세탁기 빨래
여기다 널어요,
다시 말하지만 빨래 널 때 탈탈 터세요,
여보, 그리고 이런 거 가지고
시 쓰지 마요,
사람들이 뭐라 그래요.
그냥 빵 터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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