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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book)/김용택

《섬진강》 김용택, 창비시선0046, 1985년 1월

by Sisnaajinii(씨스나지니) 2024.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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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人(시인) 金龍澤(김용택)씨 수상. 6회 金洙映(김수영) 문학상

  제 6회 金洙映(김수영) 문학상 수상자로 시인 金龍澤(김용택)씨 <사진>가 선정되었다. 수상작은 시집 「맑은 날」(창작사刊(간)). 전북 임실군 덕치면에서 국민학교 교사로 재직 중인 金(김)씨는 1982년 창작과 비평사의 「21인 신작시집」에 시 「섬진강1」 등을 발표하며 데뷔한 신예 시인이다. 작년 첫 시집 「섬진강」을 냈으며, 지난 8월 제 2시집 「맑은 날」을 출간했다.

  그의 시는 『시대 착오적인 면이 없지 않으나 관념을 배제하고 체험에 뿌리내린 긍정적인 삶의 자세와 청정한 서정성이 돋보인다』는 評(평)을 받았다.

  지난 81년 도서출판 民音社(민음사)와 유족들이 공동제정한 金洙映(김수영) 문학상은 그동안 鄭喜成(정희성), 李晟馥(이성복), 黃芝雨(황지우), 金光圭(김광규), 최숭호氏(씨) 등 다섯 시인이 수상했다.

 

1986년 강원도 홍천에서 군복무를 하고 있던 형이 신문기사를 오려서 동봉한 편지를 보냈습니다. 김용택 시인의 <섬진강>과 <맑은 날> 두 권을 사서 우편으로 보내달라는 내용의 편지였습니다. 한창 대입 학력고사를 대비해서 마지막 정리를 하고 있었을 고 3 수험생이은 밤을 새며 단숨에 읽어 내려 갔답니다. 형한테 소포를 보내고 나선 바로 다시 두 권을 사서 읽고 또 읽었답니다. 그렇게 섬진강 시인의 시들이 제게로 왔답니다. 

 

 

섬진강 15 - 겨울, 사랑의 편지

 

산 사이

작은 들과 작은 강과 마을이

겨울 달빛 속에 그만그만하게

가만히 있는 곳

사람들이 그렇게 거기 오래오래

논고 밭과 함께

가난하게 삽니다.

겨울 논길을 지나며

맑은 피로 가만히 숨 멈주고 얼어 있는

시린 보릿잎에 얼굴을 대보면

따뜻한 피만이 얼 수 있고

따뜻한 가슴만이 진정 녹을 수 있음을

이 겨울에 믿습니다.

달빛 산빛을 머금으며

서리 낀 풀잎들을 스치며

강물에 이르면

잔물결 그대로 반짝이며

가만가만 어는

살땅김의 잔잔한 끌림과 이 아픔

땅을 향한 겨울 풀들이

몸 다 뉘인 이 그리움

당신,

아, 맑은 피로 어는

겨울 달빛 속의 물풀

그 풀빛 같은 당신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 시를 참 좋아했었나 봅니다. 살짝 위를 접어 두었더군요. 그래도 시집 <섬진강>에서 다음 시로 넘어가지 못 하고 읽고 다시 첫 싯구부터 읽고 했던 시는 '섬진강 4 - 누님의 초상'이었습니다. 지금도 이 시는 깊은 속에서부터 들릴듯 말듯 아주 미세한 울림이 점점 커지며 제 영을 쿵한답니다.

 

섬진강 4 - 누님의 초상

 

  누님, 누님들 중에서 유난히 얼굴이 희고 자태가 곱던 누님, 앞산에 달이 떠오르면 말수가 적어 근심 낀 것 같던 얼굴로 다그늘진 강 건너 산속의 창호지 불빛을 마루 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 있던 누님. 이따금 수그린 얼굴 가만히 들어 달을 바라보면 달빛이 얼굴 가득 담겨지고, 누님의 눈에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그  그렁 그렁한 눈빛을 바라보며 나는 누님이 울고 있다고 생각했었지요. 왠지 나는 늘 그랬어요. 나는 누님의 어둔 등에 기대고 싶은 슬픔으로 이만치 떨어져 서 있곤 했지요. 그런 나를 어쩌다 누님이, 누님의 가슴에 꼭 껴안아주면 나는 누님의 그 끝없이 포근한 가슴 깊은 곳이 얼마나 아늑했는지 모릅니다. 나늘 안은 누님은 먼 달빛을 바라보며 내 등을 또닥거려 잠재워 주곤 했지요. 선명한 가르마길을 내려와 넓은 이마의 다소곳한 그늘, 그 그늘을 잡을 듯 잡을 듯 나는 잠들곤 했지요.

 

  징검다리에서 자욱하게 죽고 사는 달빛, 이따금 누님은 그 징검다리께로 눈을 주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지요. 강 건너 그늘진 산속에서 산자락을 들추며 걸어나와 달빛 속에 징검다리를 하나둘 건너올 누군가를 누님은 기다리듯 바라보곤 햇지요.

 

  그러나 누님, 누님이 그 잔잔한 이마로 기다리던 것은 그 누구도 아니라는 것을, 누님 스스로 징검다리를 건너 산자락을 들추고 산그늘 속으로 사라진 후 영영 돌아오지 않을 세월이 흐른 후, 나도 누님처럼 마루 기둥에 기대어 얼굴에 달빛을 가득 받으며 불빛이 하나둘 살아나고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누님이 그렇게나 기다리던 것은 그 누구도 아니며 그냥 흘러가는 세월과 흘러오는 세월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나도 얼마나 많은 아름다운 것들과 헤어져 캄캄한 어둠 속을 헤매이며 아픔과 괴로움을 겪었고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것들과 만나고 또 무엇인가를 기다렸는지요. 아름다운 것들이 아픔과 슬픔인지요 누님.

 

  누님, 누님의 세월, 그 세월을, 아름답고 슬픈 세월을 지금 나도 보는 듯합니다.

 

  누님, 오늘도 그렇게 달이 느지막이 떠오릅니다. 달그늘진 어둔 산자락 끝이 누님의 치마폭같이 세월인 양 펄럭이는 듯합니다. 강변의 하얀 갈대들이 누님의 손짓인 양 그래그래 하며 무엇인가를 부르고 보내는 듯합니다. 하나둘 불빛이 살아났다 사라지면서 달이 이만큼 와 앞산 얼굴이 조금씩 들춰집니다. 아, 앞산, 앞산이 훤하게 이마 가까이 다가옵니다. 누님, 오늘밤 처음으로 불빛 하나 다정하게 강을 건너와 내 시린 가슴 속에 자리잡아 따사롭게 타오릅니다. 비로소 나는 누님의 따뜻한 세월이 되고, 누님이 가르쳐준 그  그리움과 기다림과 아름다운 바라봄이 사랑의 완성을 향함이었고 그 사랑은 세월의 따뜻한 깊이를 눈치챘을 때 비로소 완성되어 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누님, 오늘밤 불빛 하나 오래오래 내 가슴에 남아 타는 뜻을 알겠습니다. 누님, 누님은 차가운 강 건너온 사랑입니다. 많은 것들과 헤어지고 더 많은 것들과 만나기 위하여, 오늘밤 나는 사랑 하나를 완성하기 위하여 그 불빛을 따뜻이 품고 자려 합니다. 누님이 만나고 헤어진 사랑을 사랑하며 기다렸듯 그런 세월, 그 정겨운 세월...... 누님의 초상을 닦아 달빛을 받아 강 건너 한자락 어둔 산속을 비춰봅니다.

 

 

숨이 컥컥 막히는 불볕 속에서 땀을 팥죽같이 흘리며 태양 속에 일과 함께 들어거셨다가 집에 오실 때면 얼굴이 팅팅 부었어도 쉴 때면 허리가, 온 삭신이 아프시다며 한참을 쉬지 않으시는 우리 어머니, 이 글들은 그분들께는 참으로 하찮은 이야기이다. "시가 다 뭣이다냐, 고것이 뭐여, 뭔  소용이여" 하시는 어머님의 물음은 곧 내 물음이 되어 우리 땅을 향한 내 채찍이 되어 나늘 늘 후려쳐 피 흘리게 한다. 동네 사람들 간에 허심탄회하신 마음의 정갈하심, 끝없이 삶에 대해 낙천적이신 어머님은 내 나머지 삶의 지침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