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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book)/김용택

《키스를 원하지 않는 입술》 김용택, 창비시선 0360, 2013년 4월

by Sisnaajinii(씨스나지니) 2024.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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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입술

 

작은 물고기들이 등을 내놓고 헤엄을 친다

보리밭에서는 보리가 자라고 밀밭에서는 밀이 자라는 동안

산을 내려온 저 감미로운 바람의 발길들,

달빛 아래 누운 여인의 몸을 지난다.

달콤한 키스같이 전체가 물들어오는, 이 어지러운 유혹의 입술,

오! 그랬어.

스무살 무렵이었지.

나는 날마다 저문 들길 끝에

서 있었어.

어둠에 파묻힌 내 발목을 강물이 파갔어.

비가 오고, 내 몸을 허물어가는 빗줄기들이 강물을 건너갔어. 그 흰 발목들,

바람이 불면 눈을 감고 바람의 끝을 찾았지.

얼굴을 스쳐지나가는 단내 나는 바람!

나는 울었어. 외로웠다니까. 너를 부르면 내 전부가 딸려갔어.

까만 돌처럼 쭈그려앉아 눈물을 흘렸어.

그리움을 누르면 피어나던 어둠 속에 뜨거운 꽃잎들,

말이 되지 않는 말들이 나를 괴롭혔어. 집요했어.

바위 뒤 순한 물결 속에 부드러운 뼈를 가진 작은 물고기들이 모여

달빛으로 등을 말리고

물살을 일으키며 그렇게 산등성을 달려내려왔어.

그러던, 그러던 그 어느날

오동꽃이 피던 마지막 그 찬란한 봄날,

가벼운 시장기에 시달리던 그 어느 아름다운 봄날,

잔고기떼가 그렇게 산등성에 반짝이던 날

산수유 새잎처럼 날카로운 혀끝이 하늘과 땅을 가르며

시가 내게로 왔어. 닭이 울고

알 수 없는, 저 깊은 산속에서 거부할 수 없는, 내가 나를 이기지 못하던

강물을 끌고 나오며

날 불렀어.

환한 목소리.

 

'처음처럼 수줍다'고 말하는 시인, 1986년 그의 <섬진강>과 <맑은 날>을 단숨에 읽어 내려가던 그 밤, 그 새벽. 돈을 쫓아 도시의 밀림에서 사냥을 하고 있는 사람 하나 당신이 부럽습니다. 산수유 새잎처럼 날카로운 혀끝이 하늘과 땅을 가르며 오지 않을 시여...... 시인이여, 달빛 아래 누워 있는 여인의 입술에 그 입술을 가져가기 전에 난리가 나요, 참고 진정하셔요..... ㅋ

 

 

그해 여름

 

공중에서 제비들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그해 여름 매미는 일생이 비였고

 

날지 못한 하루살이도 일생이 비였다.

 

기가 막힌 숲은 비를 받아 내리며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산딸기들은 단내를 잃은 채 젖은 얼굴로 땅에 떨어졌다.

 

다리 젖은 개미들은 긴 여행의 집을 수리하지 못했다.

 

귀뚜라미들은 음유를 잃고

 

니의 방 창호지 문에 들이친 비가

 

방으로 들어오려는 순간의 달빛을 문밖에 세워두었다.

 

문이 무거워졌다. 강기슭 방에 있던 나의 시는

 

버들잎을 타고 떠내려오는 어린 초록 메뚜기 손을 잡고

 

가까스로 한쪽이 무너진 버들잎 나룻배의 무거운 손님이 되었다.

 

팅팅 부은 달팽이들의 퀭한 분노의 눈빛들,

 

술꾼들에게 쫓겨나 처마 밑에 누운 수척한 우산 속의 빗줄기들

 

어머니는 기둥 끝에 닿은 강물을 피해 캄캄한 밤 집을 떠났다가

 

강물이 잠깐 물러가면 젖은 빨래들을 짜며 귀가했다.

 

행적이 묘연한 이상한 지구의 그해 여름 전선 없는 게릴라 폭우,

 

비. 비가 새는 집. 이 모든 것들을 제 몸에 실은 범람한 강물은

 

내 친구의 집 마당을 지나 현관으로 들어가 신발을 가져갔다.

 

맨발로 물 쓴 고추를 따러 간다.

 

농부들의 발이 굼벵이처럼 땅속에 묻힌다.

 

그해 여름, 어둔 땅속에서

 

칠년을 기다렸다가 일주일을 살다 간

 

날개 젖은 매미들은 일생이 비였다.

 

다섯 번의 빙하기에 살았던 생명들은 일생이 얼음과 눈보라. 1990년대를 지나며 게릴라성 호우, 마른 장마를 자주 마주치게 되었다. 잦은 냉해와 폭우와 폭염의 큰 낙폭을 겪으며 여섯 번째 빙하기가 서서히 느끼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이로 날카로운 비수를 날리고 있습니다. 그 여섯 번째 빙하기에 살아남는다면 우리 아이들은 일생이 얼음 덩어리와 눈보라이겠지요. 설국열차를 타게 그냥 두시겠어요? 비싼 사과와 감귤에 화들짝 놀라지 마셔요. 제철이 바뀐 하우스 과일과 채소처럼 저 과수원들에 지붕을 시우려고 하지 마시고 아프다고 하는 지구를 위해 밤을 새며 미지근한 물수건을 갈아주며 열을 내려주어요.

 

 

정서의 이주

 

오늘은 놀기로 했다.

지난겨울 폭설로 부러진 소나무 가지 속살이 하얗다.

나는 쓰레기를 두고

다른 일을 못한다.

비를 맞으며 쓰레기를 버리러 간다.

내 몸이 뜨거운지 비가 차다.

아파트 여자들이 내 종종걸음을 곁눈질한다.

빗방울들이 화살나무 끝에 쪼르르 매달려 있다.

저 이슬방울 고리를 걸어볼까.

쇠고리를 걸고 저쪽 단풍나무 가지에 매달린

이슬방울로 건너가 힘을 보태볼까,

그 옆 백일홍나무랑 자작나무는 몸이 으스스 젖었다.

봄이 올 때쯤, 마른 풀잎들은 마른 만큼 비에 젖는다는 것을

알게된다.

얘야, 양지쪽 잔디 속을 뒤적거려보았니?

따뜻하면 벌레들도 밖으로 기어나온다.

오늘은 놀기로 했다.

나무들은 쉬지 않아서

무슨 정리든,

정리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나도 그걸 배워야 하는데,

이슬방울들이 매달린 나무를 발로 찰까. 손으로 흔들까.

이슬방울들이 백일홍 가지에서 뛰어내린다,

나무를 끝까지 올려다보며

손을 털면 된다.

나무를 흔든 손에 물기가 묻혔다.

엉덩이에 문질러 닦는다.

쓰레기를 버리고

그렇지, 부러진 소나무 가지, 그 아래 지나

집으로 간다.

나는 오늘 생각이 저 가는 대로 두고 따로 놀기로 했다.

낮잠 잔 자리에서 빗소리가 들린다.

누가 마른 풀잎들을 눕히며

먼 데서 걸어오고 있었다.

 

'이슬방울들이 백일홍 가지에서 뛰어내려' 시인과 놀아주었을까요, 냅다 달려 자기들끼리 놀았을까요? 자연과 깊이 교감하는 시인이 부럽습니다. 자그마한 교감 속에서도 삶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충분히 나눌 수 있음을 보여주는군요. '오늘은 놀리로 했다'고 말하는 시인처럼, 매일 매일 그렇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꽃 보러 왔나봐요

 

아침 산에 올랐다. 바위틈에 핀 진달래꽃을 바라보고 앉아 있다. 꽃아 가만히 있다.

"꽃 보러 왔나봐요?"

한 가지에서도, 어떤 꽃은 피고 어떤 꽃은 졌다. 어떤 꽃은 지금 피려고 하고, 어떤 꽃은

지금 필까 말까 고민 중이고, 어떤 꽃은 아예 마음이 없다.

나는 어제도 오고 그제도 왔답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이 세상에 오지 않은 꽃이랍니다.

"꽃 보러 왔나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