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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book)194

《내 따스한 유령들》 김선우, 창비시선 0461 (2021년 8월) 쉬잇! 조심조심 동심 앞에서는   강릉 바닷가에서 사는 아홉살 좌 서연이, 해먹에서 놀다가 갑자기 짖기 시작한다. 왕왕, 왈왈왈, 캉캉, 크앙크앙, 와릉와릉...... 산책길에 만난 이웃집 강아지 생각이 난 듯 너무 오래 짖길래 한마디 한다. "목 아프지 않아?" "쉬잇, 지금 중요한 이야길 하는 중이예요." 한참을 더 짖어대는 인간 아이가 눈부시다.    저런 때가 내게도 있었다. 아홉살 열살, 열한살, 어린 동생들과 바닷가에서 조가비를 줍던, 바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고 싶어서 한없이 귀를 낮추던 때, 이윽고 귀가 물거품처럼 부풀고 공기방울의 말이 내 몸으로 스르르 들어왔다 나가면서 바다와 대화하고 있다고 느껴지던 신비한 순간들이.   오전 내내 짖는 조카를 보며 잘 늙어가고 싶은 어른으로 딱 .. 2024. 6. 18.
《無等(무등)에 올라》 나해철, 창비시선 0044 (1984년 6월) 그건 아야해 풀을 꺾는 내 아이에게풀은 아프다고 알려줬다.아이는 꺾인 것을 보면언제나 아야해그건 아야해어떻게 설명해주어야 하나바보와 같은 이 행성.이쪽과 저쪽에서 끊임없이버려지는귀한 그 누구의 아버지, 누군가의자식과 아내, 그 행복,불도저에 밀리는 가족과족속, 그들의 평화와 기도,이대로 간다면사랑과 따뜻함을 다 익히기도 전에증오와 파괴의 추문은해일처럼 밀어닥칠 것이고너는 지극한 슬픔, 우리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답답함과 부끄러움에 울 것이다.아이야 너는 오늘도꽃을 꺾는 한 어른에게아야해, 그건 아야해작은 풀밭의 나라를 떠나며풀꽃들에게 손을 흔들며안녕 안녕 아이들에게 어른이 되라고 합니다. 어떠 어른이냐면 경쟁에서 이기고, 출세하고, 돈을 많이 벌고, 이름을 날리고, 뭐 그런가요, 다른 사람을 밟고 우.. 2024. 6. 16.
《꽃샘 추위》 이종욱, 창비시선 0028 (1981년 5월) 꽃샘추위 살아서 갚을 빗이 아직 많다새벽 공기를 돌려야 할 집이 아직 많다두드려도 울리지 못하는 가슴이 아직 많다죽어서도 물음을 묻는 무덤이 아직 많다 우리 발에 올가미가 걸릴 때우리 목을 억센 손이 내리누를 때마주보는 적의 얼굴가거라한치도 탐하지 말라몇점 남은 우리 몸의 기름기겨울의 마지막에 아낌없아 불을 당겨겹겹이 쌓인 추위 녹일 기름한치도 탐하지 말라 우리의 머슴이 되지 않으면우리의 주인이 될 수 없다 가져가거라마주잡는 손과 손을 갈라놓는 찬바람꿈에까지 흉측한 이빨자국 찍고 가는 찬바람을씨 뿌린 자가 열매 거둘 날이 가까왔다 번개가 번쩍이는 밤우리는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지 안다갚을 빛이 얼마나 많이 남았는지 안다식중독으로 뜬눈으로 새우는 밤우리는 하늘의 뜻을 버렸음을 깨닫는다무덤 속에서 살아 잇.. 2024. 6. 15.
《하급반 교과서》 김명수, 창비시선 0039 (1983년 5월) 후렴 여름방학을 맞아 내 아들이 가져온 성적표를 보면음악과목이 낙제점수다나는그러리라 짐작하고 있었다섭섭하게도 내 아들은 노래를 부르지 못하니까목소리는 제법 우렁차지만아들의 노래는 고음에도 걸리고 저음에도 걸린다제 목소리 하나도 조정하지 못한다모처럼 노래를 시켜보아도남이 부르던 노래귓전에 익숙하고 입에 익은 가락만 흥얼거린다누구일까, 내 아들의 음성을 망치는 자는?노래를 못 부르는 조상의 피 탓일까아니면 흥에 겨워 스스로 흥얼거리는 자신의 탓일까악보 하나도 제대로 읽지 않고오선지 한 줄도 제대로 보지 않는변성기도 아직 먼 내 아들에게후렴만 부르게 하는 자는 누구일까 초, 중, 고 음악시간 치르는 음악시험으로 곤욕을 치루곤 했지요. 이론 시험은 내용을 이해하면 100점, 처음에 노래 시험이 어려웠으나 KBS.. 2024. 6. 15.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김선우, 창비시선 0344 (2012년 3월) 하이파이브 일년에 한번 자궁경부암 검사 받으러 산부인과에 갈 때커튼 뒤에서 다리가 벌려지고차고 섬뜩한 검사기계가 나를 밀고 들어올 때세계사가 남성의 역사임을 학습 없이도 알아채지 여자가 만들었다면 이 기계는 따뜻해졌을 텐데최소한의 예열 정도는 되게 만들었을 텐데그리 어려운 기술도 아닐 텐데개구리처럼 다리를 벌린 채차고 거만한 기계의 움직임을 꾹 참아주다가 커튼이 젖혀지고 살짝 피가 한 방울, 이 기계 말이죠 따뜻하게 만들면 좋지 않겠어요?처음 본 간호사에게 한마디 한 순간 손바닥이 짝 마주쳤다두마리 청개구리 손바닥을 짝 마주치듯 맞아요, 맞아!저도 가끔 그런 생각 한다니깐요, 자요, 어서요, 하이파이브! 김선우 시인의 시 '하이파이브'는 남자들이 상상하지 못할, 경험하지 못할 상황을 날카롭게 비판을 합니.. 2024. 6. 9.
《맑은 날》 김용택, 창비시선 0056, 1986년 8월 섬진강 22 - 누님의 손끝 누님. 누님 같은 가을입니다. 아침마다 안개가 떠나며 강물이 드러나고 어느 먼 곳에서 돌아온 듯 풀꽃들이 내 앞에 내 뒤에 깜짝깜짝 반가움으로 핍니다. 누님 같은 가을 강가에 서서 강 깊이 하늘거려 비치는 풀꽃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누님을 떠올립니다. 물동이를 옆에 끼고 강으로 가는 길을 따라 강물에 이르르면 누님은 동이 가득 남실남실 물을 길어 바가지물 물동이에 엎어 띄워놓고 언제나 그 징검다리 하나를 차지하고 머리를, 그 치렁치렁한 머리채를 흘러가는 강물에 풀었었지요. 누님이 동이 가득 강물을 긷고 머리를 감는 동안 나는 물장난을 치며 징검다리를 두어 간씩 힘껏힘껏 뛰어다니거나 피라미들을 손으로 떠서 손사래로 살려주고 다시 떠서 살려주며 놀다가 문득 누님을 쳐다보면 노을은.. 2024. 6.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