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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book)/김선우

《내 따스한 유령들》 김선우, 창비시선 0461 (2021년 8월)

by Sisnaajinii(씨스나지니) 2024.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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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잇! 조심조심 동심 앞에서는

 

  강릉 바닷가에서 사는 아홉살 좌 서연이, 해먹에서 놀다가 갑자기 짖기 시작한다. 왕왕, 왈왈왈, 캉캉, 크앙크앙, 와릉와릉...... 산책길에 만난 이웃집 강아지 생각이 난 듯 너무 오래 짖길래 한마디 한다. "목 아프지 않아?" "쉬잇, 지금 중요한 이야길 하는 중이예요." 한참을 더 짖어대는 인간 아이가 눈부시다.

  

  저런 때가 내게도 있었다. 아홉살 열살, 열한살, 어린 동생들과 바닷가에서 조가비를 줍던, 바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고 싶어서 한없이 귀를 낮추던 때, 이윽고 귀가 물거품처럼 부풀고 공기방울의 말이 내 몸으로 스르르 들어왔다 나가면서 바다와 대화하고 있다고 느껴지던 신비한 순간들이.

 

  오전 내내 짖는 조카를 보며 잘 늙어가고 싶은 어른으로 딱 한가지만은 하지 않기로 한다. 네가 짖는 대신 개에게 사람의 말을 가르치면 되잖아, 이런 따위 말만큼은 하지 않는 걸로 시인 이모의 소임을 다하는 시간. 눈앞의 동심이 눈부셔 여름 아침이 투명하게 왈왈거린다.

 

 

마스크에 쓴 시 12

 

함부로 깨우지 마라 우리의 단잠을

함부로 이동시키지 마라 우리의 주거지를

너희는 조용히 너희의 삶을

우리는 조용히 우리의 삶을

 

누가 그들의 영토를 침범했나?

누가 그들 삶의 방식을 교란 시켰나?

누가 그들을 뒤흔들어

불편한 숙주인 인간에게까지 오게 했나?

 

두꺼운 스모그에 가려졌던 산봉우리들이 눈부신 이마를 드러낸 아침이다

인간에게 쫓겨났던 거북이들이 알을 낳으려 해변으로 돌아오는 저녁이다

밤이 깊어질수록

밤을 낮처러 밝혀온 거짓 밤들의 허약한 육체가 드러난다

우리가 지녀온 밤의 문양들은 아름다웠나?

서로를 살려왔나?

 

다른 동물과 공생하던 그들을 여기까지 오게 만든 자......

바이러스의 디아스포라를 만든 장본인인 우리는

 

작은 인간이어야 마땅한 종이 교만해졌을 때

작은 인간이어야 마땅한 종이 위대해지기를 원할 때

작은 인간이어야 마땅한 종이 탐욕을 제어하지 못할 때

거기가 원죄다

야생을 포획해 감금하는 인간

다른 존재의 거주지를 서슴없이 파괴하는 인간

끔직한 방식으로 가축을 만들고 사육하는 인간

 

텅 빈 도심으로 홍학이 산양이 얼룩말이 돌아오는 시간이다

인간보다 먼저 이 별에 거주한 선주민들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했나?

우리의 질문은 인간을 넘어설 수 있나?

우리 ...... 

다른 존재들을 멸종시키면서 스스로 멸종위기종이 되어 가는 우리는

 

코로나19 팬데믹을 겪고 작은 인간은 탐욕의 그 끝을 보았다. 누군가의 두려움과 공포가 곧 돈이 된다는 진리를 발견했다고 환호성을 질렀다. 인공지능과 바이오혁명을 통해 아픈 사람을 많이 만들어야 돈을 벌수 있다는 진리를 발견했다. 차고 넘치는 돈으로 목욕을 하며 돈다발로 바벨탑을 세우기로 했다. 스스로 멸종의 길을 택했다. 나는 죽지 않는다. 나는 곧 신이며 돈이다. 더 큰 바이러가 몰려와 저 어리석은 양들을 죽음의 늪으로 몰아넣어라. 그러면 그 중 몇몇은 죽겠지만 모두 내게 조공을 하는 노예가 될테니.

 

 

울어주는 일, 시를 쓰는 일

 

1

  이런 기록은 어디에 묻고 묘비를 세워야 할까요?

  그들을 위해 허락된 땅, 울어줄 이 드무니 여기에 자리를 마련합니다.

  시집은 울어주는 집이기도 하니까요

 

2

  2000년 이후 가축전염병으로 살처분 당한 동물의 수 9800만마리 이상. 2010년 겨울 구제역과 조류독감으로 1000만마리가 넘는 동물이 생매장당한 살처분 매몰지가 4799곳. 2016년 겨울 조류독감으로 살처분된 가금류 3300만마리. 2019년 구제역으로 살처분된 소가 2000마리 ...................."

 

3

  매몰된 땅에서 그들의 냄새가 밤낮없이 풍겨 나오는데

  그들의 살이 차오르는 매립지에 금을 그어놓고

  인간은 다시 땅장사를 시작한다.

  

  그땅들에 죽음은 없다.

  그들은 생명이 아니었기에.

 

  그들의 마지막 만져준 구름들과 

  몇몇 작은 인간이 집 안과 밖에서 울었다.

 

  울어주는 일을 통해

  그들의 체온을 낱낱이 기억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는 채로.

 

이 지구별에서 이 작은 인간보다 잔인하고 잔악한 짐승이 있을까? 당신의 죄를 왜 죄 없는 소와 돼지와 멧돼지와 오리와 닭과 철새들에게 누명을 씌우고 홀로코스트를 만드는가? 당신은 사형입니다. 이 지구별 재판정에서. 판결 즉시 집행. 일말의 동점심을 받을 자격 박탈.

 

 

오늘은 없는 날

 

아무것도 안 하는 중이예요. 행복하고 싶어서

 

정치 마케팅과 상품 마케팅에 유혹당하지 않게

말 많고 현란한 매체들에 귀 닫고 눈 감아요

돈이든 권력이든 세력 불리는 일에 중독된 사람들

필요와 정의 타령에 넘어갈까봐 하늘을 봐요

조용히

더 조용히

오늘은 없는 날

 

눈 뜨니 오늘이 있어

없는 날이라 부르기로 해요

 

없는 날에 할 일은

바람 속에서 시집 몇 페이지를 천천히 읽고

아침과 저녁의 산책을 출생 이전처럼 하는 것

 

지구가 우주의 일원으로 오늘을 걷고

운 좋게 지구에 탑승한 오십년 차 승객인 나도

지구와 함께 걸어요

지구의 입장에선 자갈돌 하나인 나

우주의 입장에선 티끌 한점도 안 되는 나

이토록 작은 존재에 허락된 하루를 오직 감사하면서

 

오늘은 없는 날

행복하고 싶어서

구름 버튼을 눌러 당신 목소리를 들어요

나야, 바람이 좋아

나와 함께 당신이 살아 있어 이렇게나 좋아

더 많이 아낄 수 있어 더 없이 좋은 날

사랑하는 일 말곤 아무것도 안 할래

 

어제도 내일도 없는 오늘

많이 행복해서

당신과 함께 산으로 가요

없는 날의 자유

푸른 바람 속을 무한무한 걷고 달려요.

 

 

푸른발부비새, 푸른 발로 부비부비

 

바스락, 푸른 발

한쪽씩 들어 보이며 구애를 하지

으쌰으쌰, 받아줘받아줘사랑하자사랑하자

 

바스락, 푸른 싹

봄마다 새잎 밀어 올리는 이 힘은 대체 어디로부터

으쌰으쌰, 사랑하자사랑하자네게갈게네게갈게

 

다정하고 장엄한 이런 아침

네가 웃자 바스락,

네 뺨을 감싼 공기의 한줄기 끝에서

새싹이 돋듯

이랑이 막 깨어난 듯

 

인생 별거 없다

안다

그래도 좋다

그래서 좋다

이런 순간이

 

바스락, 으쌰으쌰, 사랑하자사랑하자인생별거없다그래도좋다그래서좋다너를안으니좋다

단순히 낙천성의

바스락,

바스락,

바스락거리는 힘

 

꼬리를 살랑거리다 가버린 빛에 대해 말하는 것이

꼬리를 끌고 막 도착한 빛에 대해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이런 바스락,

 

우리에겐 다만 빛 드나드는 마음의 창문을 열어두는 연습이

으쌰으쌰, 으쌰으쌰

바스락, 바스락

 

쌓아 두기만 하고, 그 쌓인 책 위에 또 책을 보태기만 하다가, 하루에 한 권씩 창비시선을 읽어보자고 제 귀에 소곤소곤 하더군요. 시집을 한 권  읽고 그 가운데에서  3 ~ 4편의 시를 다시 돌려 읽어보자고 소곤소곤 했답니다. 그러다 김선우 시인의 <내 따스한 유령들>을 펴면 첫 장에 서 만나는 ' 푸른발부비새, 푸른 발로 부비부비'  읽고 이 시인의 글들은 따로 나누어서 정리하자고, 얼마나 시를 쓰기 위해 노력했으면, 아니 천재여서 이런 시가 나올 수 있을까 놀라고 부럽고 질투나고. 바스락, 으쌰으쌰, 사랑하자사랑하자인생별거없다그래도좋다그래서좋다너를안으니좋다. 시인을 꼬옥 안아 주고 싶어지더군요.

 

 

인간의 만든 세상의 참혹함.

 

그럼에도 존재하는

어떤 아름다움들.

 

고통에 연대하는 간곡한 마음들.

 

작고 여리고 홀연한 그 아름다움들에 기대어

오늘이 탄생하고 내일이 기다려집니다.

 

고맙습니다. 세상의 무수한 스승들이여.

 

시인이 많이 아팠나봅니다. 회복기에 접어들기까지 꼬박 일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당신, 부디 평강하시길. 그리고 좋은 글, 건강을 해치지 않은 선에서 좋은 글, 좋은 시 부탁드립니다. 바스락, 으쌰으쌰, 사랑하자사랑하자인생별거없다그래도좋다그래서좋다너를안으니좋다. 김선우 시인을 꼬옥 안아 줄께요.

 

 

지난 5월 부산 출장 가는 길에 KTX에서 읽고 가방에 챙겨 넣었는데, 보이질 않더군요. 부산에 있는 호텔에도 문의하고 집을 구석구석 뒤져도 자유를 찾아 떠났나 보더군요. 알라딘의 요술 램프를 이용해서 소원을 빌었지요. 제게 찾아온 녀석은 "고통의 감수성, 행복의 감수성 ...... 단순한 낙천성 비슷한 생각하는 동지들. 오늘은 없는 날 ...... 나 건들지마." 그런 주인에게서 탈출을 시도했나 봅니다. 그런데 제 품에 들어왔으니 좋아할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