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파이브
일년에 한번 자궁경부암 검사 받으러 산부인과에 갈 때
커튼 뒤에서 다리가 벌려지고
차고 섬뜩한 검사기계가 나를 밀고 들어올 때
세계사가 남성의 역사임을 학습 없이도 알아채지
여자가 만들었다면 이 기계는 따뜻해졌을 텐데
최소한의 예열 정도는 되게 만들었을 텐데
그리 어려운 기술도 아닐 텐데
개구리처럼 다리를 벌린 채
차고 거만한 기계의 움직임을 꾹 참아주다가
커튼이 젖혀지고 살짝 피가 한 방울,
이 기계 말이죠 따뜻하게 만들면 좋지 않겠어요?
처음 본 간호사에게 한마디 한 순간 손바닥이 짝 마주쳤다
두마리 청개구리 손바닥을 짝 마주치듯 맞아요, 맞아!
저도 가끔 그런 생각 한다니깐요, 자요, 어서요, 하이파이브!
김선우 시인의 시 '하이파이브'는 남자들이 상상하지 못할, 경험하지 못할 상황을 날카롭게 비판을 합니다. 자궁경부암 검사를 받으로 간 여성의 겪는 불편함과 불쾌감을 통해 의료 기기가 어떻게 디자인되었는지에 대한 비판을 노래합니다. 검사 기계의 차갑고 거만함은 의료 기술이 남성 중심적인 역사와 문화 속에서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드러내며, 여성의 관점과 요구가 기술 개발에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합니다. 그리고 여성간의 연대와 공감을 부각시킵니다.
반짝, 빛나는 너의 젖빛
그러니까 오리온자리의 삼태성이 별안간
젖꼭지처럼 보인 날이다
하늘을 쳐다보다 입안에 단침이 고인 날이다
거기에 입술을 대고 싶어
배꼽 밑이 찌르르해진 날이다
그러니까 오리온이라는 힘센 사나이의 중심
움푹 펜 상처처럼 고인 허공에서
유선이 곱게 발달한 젖가슴을 느낀 날이다
천체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내 시선으로
살맛 달큰한 비린내가 초유처럼 흘러든 날이다
은하는 깊은 곳으로 찔린 듯 쏟아지고
지구인 내 취향은 점점 오리무중이 되어가는 것인지
반짝, 빛나는 아름다운 너의 별자리들마다
모조리 양성구유인 소한(小寒) 날이다
* 양성구유: 선천적으로 여성과 남성 성기를 모두 가지고 있는 사람
겨울철 밤하늘에 가장 두드러지고 인식하기 쉬운 오리온 자리, 남성성을 상징하는 사냥꾼을 형상화 한 별자리. 그리고 겨울 추위의 절정인 소한......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 2011년을 기억함
그 풍경을 나는 이렇게 읽었다
신을 만들 시간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서로를 의지했다
가녀린 떨림들이 서로의 요람이 되었다
구해야 할 것은 모두 안에 있었다
뜨거운 심장을 구근으로 묻은 철골 크레인
세상 모든 종교의 구도행은 아마도
맨 끝 회랑에 이르러 우리가 서로의 신이 되기를
흔들리는 계절들의 성장을 나는 이렇게 읽었다
사랑합니다 그 길 밖에
마른 옥수숫대 끝에 날개를 펴고 앉은 가벼운 한 주검을
그대의 손길이 쓰다듬고 간 후에 알았다
세상 모든 돈을 끌어모으면
여기 이 잠자리 한마리 만들어낼 수 있나요?
옥수수밭을 지나온 바람이 크레인 위에서 함께 속삭였다
돈으로 여기 이 방울토마토꽃 한 송이 피울 수 있나요?
오래 흔들린 풀들의 향기가 지평선을 끌어당기며 그윽해졌다
햇빛의 목소리를 엮어 짠 그물을 하늘로 펼쳐 던지는 그대여
밤이 더러워지는 것을 바라본 지 너무나 오래되었으나
가장 낮은 곳으로부터 번져온 수많은 눈물방울이
그대와 함께 크레인 끝에 앉아서 말라갔다
내 목소리는 그대의 손금 끝에 멈추었다
햇살의 천둥번개가 치는 그 오후의 음악을 나는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는 다만 마음을 다해 당신이 되고자 합니다
받아 줄 바닥이 없는 참혹으로부터 튕겨져 떠오르며
별들의 집이 여전히 거기에 있고
온몸에 얼음이 박힌 채 살아온 한 여자의 일생에 대해
빈 그릇에 담기는 어혈의 투명한 슬픔에 대해
세상을 유지하는 노동하는 몸과 탐욕한 자본의 폭력에 대해
마음의 오목하게 들어간 망명지에 대해 골몰하는 시간이다
사랑을 잃지 않겠습니다 그 길 밖에
인생이란 것의 품위를 지켜갈 다른 방도가 없음을 압니다
가냘프지만 함께 우는 손들
자신의 이익과 상관없는 일을 위해 눈물 흘리는
그 손들이 서로의 체온을 엮어 짠 그물을 검은 하늘로 던져올릴 때
하나씩의 그물코,
기약없는 사랑에 의지해 띄워졌던 종이배들이
지상이라는 포구로 돌아온다 생생히 울리는 뱃고동
그 순간에 나는 고대의 악기처럼 고개를 끄덕인다
태어난 모든 것은 실은 죽어가는 것이지만
우리는 말한다
살아가고 있다!
이 눈부신 착란의 찬란,
이토록 혁명적인 낙관에 대하여
사랑합니다 그 길밖에
온갖 정교한 논리를 가졌으나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옛 파르티잔들의 도시가 무겁게 가라앉아가는 동안
수만개의 그물코를 가진 하나의 그물이 경쾌하게 띄워올려졌다
공중천막처럼 펼쳐진 하나의 그물이
무한 하늘 한녘에서 하나의 그물코가 되는 그 순간
별들이 움직였다
창문이 조금 더 열리고
두근거리는 심장이 뾰족한 흰 싹을 공기 중으로 내밀었다
그 순간의 가녀린 입술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나는 들었다 처음과 같이
지금 마주본 우리가 서로의 신입니다
나의 혁명은 지금 여기서 이렇게
2011년 아랍의 봄, 아니면 김진숙 위원장과 한진중공업 투쟁을 기억하며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시는 사랑과 연대, 그리고 서로를 의지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혁명적 변화의 필요상과 그 과정에서의 인간적 연대와 사랑의 힘을 강조하며, 개인과 사회가 함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지금 마주본 우리가 서로의 신'임을 노래합니다.
연두의 내부
막 해동된 핏방울들의
부산한 발소리 상상한다
이른 봄 막 태어나는 연두의 기미를 살피는 일은
지렁이 울음을 듣는 일, 비슷한 걸 거라고
상상해본다 최선을 다해 운다고
상상해본다 최선을 다해 웃는다고도
최선을 다해 죽는다거나
최선을 다해 이별한다거나
최선을 다해 남는다거나
최선을 다해 떠난다거나
최선을 다해 광합성하고 싶은
꼼지락거리는 저 기척이
빗방울 하나하나 닦아주는 일처럼
무량하다 무구하다 바닥이 낮아진다
아마도 사랑의 일처럼
최선을 다하는 삶, 그 강박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그 '최선'이 '사랑의 일'이라고 하니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걸까?
뜻밖에도 설렌다. 처음 떠나는 모험처럼.
나는 여전히 시가
아름다움에의 기록의지라고 믿는 종족이다.
운명이라는 말이 위로가 된다.
이것은 처절하고 명랑한 연애시집이다, 라고 독자들이 말해주면 좋겠다.
사랑한,
사랑하는,
아름답고 아픈 세상에 이 시집을 바친다
2012년 새봄 강원도에서
김선우
'책(book) > 김선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따스한 유령들》 김선우, 창비시선 0461 (2021년 8월) (2) | 2024.06.18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