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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가는 먼 집》 허수경, 문학과지성 시인선 0118 (1992년 5월) 불우한 악기 불광동 시외버스터미널초라한 남녀는술 취해 비 맞고 섰구나 여자가 남자 팔에 기대 노래하는데비에 젖은 세간의 노래여모든 악기는 자신의 불우를 다해노래하는 것 이곳에서 차를 타면일금 이 천원으로 당도할 수 있는 왕릉이 있다네왕릉 어느 한 켠에 그래, 저 초라한 벗은젖은 알몸들이김이 무럭무럭 나도록 엉겨붙어 무너지다가문득 불쌍한 눈으로 서로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 굴곡진 몸의 능선이 마음의 능선이 되어왕릉 너머 어디 먼데를 먼저 가서그림처럼 앉아 있지 않겠는가 결국 악기여모든 노래하는 것들은 불우하고또 좀 불우해서불우의 지복을 누릴 터 끝내 희망은 먼 새처럼 꾸벅이며어디 먼데를 저 먼저 가고 있구나 허수경 시인의 '불우한 악기'는 삶의 불우함과 고독을 담담하게 그려냅니다. 비에 젖은 남녀가 서로 기.. 2024. 10. 20.
《바이블 une bible, 신과 인간이 만들어온 이야기》, 필리프 르세르메이에르 지음, 레베카 도트르메르 그림, 전경훈 옮김, 니케북스 (2023년 1월) un nouveau testament 신약 새 약속 경이"가진 것이라곤 암양 한 마리밖에 없는 목동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암양이 하필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습니다. 그러면 목동은 암양을 포기해야 할까요? 바리사이들이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정해놓았으니, 목동은 암양이 고통스러워하도록 내버려두고 자신도 양젖을 영영 먹지 못하게 되도록 있어야 할까요?""물론 아닙니다." 요한이 답했다. "그러면 목동은 전 재산을 잃게 될 테니까요."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떡이며 동의했다.예수가 이어서 말했다."그럼, 여러분의 말을 따르자면, 그리고 바리사이들의 말을 따르자면, 사람보다 암양이 더 중요하다는 게 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사람 한 명이 천 마리의 암양보다 더 소중하지 않은가요? 하느님께서 계약.. 2024. 10. 19.
《잊혀지거나 알려지지 않은 공주 백과사전》 글 필립 르쉐르메이에르, 그림 레베카 도트르메르, 옮김 김희정, 청어람미디어 (2008년 1월) 두꺼비들 공주를 아세요?재스민 공주는 벌써 본 적 있으세요?어두운 저녁나절에 밤의 공주와 스쳐 지나간 적이 있나요?루이젯뜨 또또 공주와 수다를 떨거나멋쟁이 줄루 공주나 집시 공주가 모닥불 가에서춤추는 걸 지켜본 적도 있나요?반의반달 공주, 도레미 공주, 중국 하루살이 공주.이 밖에도 궁궐 깊은 곳이나 탑 꼭대기에 몸을 꽁꽁 숨긴 공주들은 셀 수 없이 많답니다.너무나도 잘 숨은 탓에 어떤 공주들은 자기가 누구인지조차 잊고 지내기도 합니다.하지만, 그녀들은 다시 찾아볼 가치가 충분히 있습니다.자, 그래서 이렇게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알려지지 않은, 이름조차 사라져 버린 공주들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보았습니다.궁궐의 비밀, 복도를 떠도는 소리, 공주방의 은밀한 속삭임, 마법의 숲,숨바꼭질. 동물 친구들.이.. 2024. 10. 19.
《새벽 들》 고재종, 창비시선 0079 (1989년 9월) 마늘싹 -농사일지 4 춘분날아직 햇살 차고 바람도 찬 날매화꽃 환한 텃밭의 지푸라기 걷어내니송곳처럼 언 땅을 뚫은마늘싹들의 예리함이여솟아라 솟아라 마늘싹들의 서늘함이여지난 겨울 내내신경통으로 우시더니 벌써머리에 수건 쓰고 마늘밭에 앉으신 어머니랑결코 한번의 겨울로 끝나지 않는삶이랑역사랑. 노오란 병아리를 여남은 마리나 데불고암탉도 마늘밭에 나선다. 고재종 시인의 시 '마늘싹'은 자연의 생명력과 그 안에 담긴 삶의 고단함을 섬세하게 보여줍니다. 봄의 시작을 알려주는 춘분날, 아직 차가운 햇살과 바람 속에서도 꿋꿋이 언 땅을 뚫고 솟아오르는 마늘싹. 그 마늘싹처럼 고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지와 끈기처럼 강인한 생명력. 겨우내 신경통에 시달리던 어머니는 봄이 오자 다시 밭으로 나섭니다. 마치 마늘싹처럼 .. 2024. 10. 15.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한강, 문학과지성사 시인선 0438 (2013년 11월) 괜찮아 테어나 두 달이 되었을 때아이는 저녁마다 울었다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디가아파서도 아니고아무 이유도 없이해질녘부터 밤까지 꼬박 세 시간 거품 같은 아이가 꺼져벌릴까 봐나는 두 팔로 껴안고집 안을 수없이 돌며 물었다왜 그래.왜 그래.왜 그래.내 눈물이 떨어져아이의 눈물에 섞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문득 말했다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괜찮아.괜찮아.이제 괜찮아. 거짓말처럼아이의 울음이 그치진 않았지만누그러진 건 오히려내 울음이었지만, 다만우연의 일치였겠지만며칠 뒤부터 아이는 저녁 울음을 멈췄다 서른 넘어야 그렇게 알았다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어떻게 해야 하는지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괜찮아왜 그래,가 아니라괜찮아.이제 괜찮아. 한강 시인의 시 「괜찮아」는 아이가 저.. 2024. 10. 13.
《자코미누스, 달과 철학을 사랑한 토끼》 레베카 도트르메르 지음, 이경혜 옮김, 다섯수레 (2022년 1월) 자코미누스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해.그러나 그는 분명 어느 날, 어떤 곳에선가 태어났어.빨간 치마를 입은 외제니 갱스보루 부인이 엄마고옆에 서 있는 장 갱스보루씨가 아빠란 건 확실해. 그런데 만약 그가 다른 날, 다른 곳에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그러니까 저 멀리 다른 곳에 살고 있는 다른 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태어났다면?그랬다면 자코미누스는 자코미누스가 되지 못했겠지!폴리카르프나 세자르, 아가통이나 뷔롱이 되었을 수도 있고,레옹이나 나폴레옹이 되었을 수도 있겠지.아니면 파란 털의 너구리나 분홍색 점박이 토끼가 되었을지도.어쩌면 ... 먼 시간과 공간을 건너 이 책을 읽고 있는바로 네가 되었을지도 모르지. 그래, 그랬을 수도 있겠다. 어쨌든 이 책은 지코미누스에 대한 이야기야.다른 .. 2024. 10.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