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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있으니까, 난 너처럼 실망 같은 건 안 해. 힘차게 자라나기만 하면 여길 벗어날 수 있거든. 저 담장을 타고 넘어서 밝은 곳으로 갈 거야."
그렇다면 ......
활짝 웃음을 베어문 담쟁이를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습니다.
나도 열심히 자라나야지. 저 친구와 함께 담장을 넘어가야지.
흙 속에서 지쳐 쉬고 있던 뿌리에 문득 힘을 주며 나는 웃었습니다.
"상상할 수 있겠니? 땅속에서 눈을 뜨면, 잠깐 동안 보았던 세상의 기억이 얼마나 눈부신지 몰라. 세상에는 바람이 있거, 바람이 실어오는 숱한 냄새들이 있고, 온갖 벌레들이 내는 소리들이 있고, 별과 달이 있고, 검고 깊은 밤하늘이 있잖아. 그것들이 견딜 수 없게 보고 싶어지곤 해. 영원히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면, 보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해져."
"걱정마."
오히려 나를 위로하는 듯 침착하게 풀은 말했습니다.
"난 믿어. 네 꽃은 언젠가 색깔을 가질 수 있을 거야."
풀의 목소리는 따스했고, 여전히 어딘가 쓸쓸하게 들렸습니다.
그런 것들이 있다. 아무리 절망하려야 절망할 수 없는 것들. 오히려 내 절망을 고요히 멈추게 하며, 생생히 찰랑거리는 '지금 이 순간'을 열러 보여주는 것들.
2002년 2월
韓江(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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