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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새벽》 박노해, 풀빛판화시선5 (1984년 9월) 노동의 새벽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새벽 쓰린 가슴으로차가운 소주를 붓는다아이러다간 오래 못가지이러다간 끝내 못가지 설은 세 그릇 짬밥으로기름투성이 체력전을전력을 다 짜내어 바둥치는이 전쟁 같은 노동일을오래 못가도끝내 못가도어쩔 수 없지 탈출할 수만 있다면,진이 빠져, 허깨비 같은스물아홉 내 운명을 날아 빠질 수만 있다면아 그러나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죽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이 질긴 목숨을,가난의 멍에를,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 늘어쳐진 육신에또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새벽 쓰린 가슴 위로차가운 소주를 붓는다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분노와 슬픔을 붓는다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기어코 깨뜨려 솟구칠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세근세근 숨쉬며 자라는우리들의 사랑우리들의 분노우리들의.. 2024. 6. 22.
《내 따스한 유령들》 김선우, 창비시선 0461 (2021년 8월) 쉬잇! 조심조심 동심 앞에서는   강릉 바닷가에서 사는 아홉살 좌 서연이, 해먹에서 놀다가 갑자기 짖기 시작한다. 왕왕, 왈왈왈, 캉캉, 크앙크앙, 와릉와릉...... 산책길에 만난 이웃집 강아지 생각이 난 듯 너무 오래 짖길래 한마디 한다. "목 아프지 않아?" "쉬잇, 지금 중요한 이야길 하는 중이예요." 한참을 더 짖어대는 인간 아이가 눈부시다.    저런 때가 내게도 있었다. 아홉살 열살, 열한살, 어린 동생들과 바닷가에서 조가비를 줍던, 바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고 싶어서 한없이 귀를 낮추던 때, 이윽고 귀가 물거품처럼 부풀고 공기방울의 말이 내 몸으로 스르르 들어왔다 나가면서 바다와 대화하고 있다고 느껴지던 신비한 순간들이.   오전 내내 짖는 조카를 보며 잘 늙어가고 싶은 어른으로 딱 .. 2024. 6. 18.
기장 싱싱채운, 바다가 한가득 기장 연화리 해녀촌 싱싱해운, 눈을 들면 부산 기장 연화리 앞바다가 눈을 내려도 부산 기장 연회리 앞바다가 한상 가득 오감을 자극하고 찌릿찌릿 전기를 줍니다. 덩달아 영과 마음이 행복을 나눕니다.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해녀들은 육지로 시집을 오거나 한 제주도 해녀들이라고 하지요. 부산 기장 연화리 해녀촌도 아마 그렇지 않을까 했는데...... 제주도 해녀가 1887년 처음 육지로 진출해 물질한 곳은 '부산부 묵도', 지금 부산 영도라고 합니다. 1915년에는 부산·경남에만 해녀가 1,700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1962년 제주 해녀 1,365명이 부산·경남으로 건너오기도 했다고 합니다. 기장군 신암어촌계 김정자 해녀회장은 "예전에는 제주도 해녀인 어머니와 나 말고는 연화리에서 물질하는 사람.. 2024. 6. 18.
《無等(무등)에 올라》 나해철, 창비시선 0044 (1984년 6월) 그건 아야해 풀을 꺾는 내 아이에게풀은 아프다고 알려줬다.아이는 꺾인 것을 보면언제나 아야해그건 아야해어떻게 설명해주어야 하나바보와 같은 이 행성.이쪽과 저쪽에서 끊임없이버려지는귀한 그 누구의 아버지, 누군가의자식과 아내, 그 행복,불도저에 밀리는 가족과족속, 그들의 평화와 기도,이대로 간다면사랑과 따뜻함을 다 익히기도 전에증오와 파괴의 추문은해일처럼 밀어닥칠 것이고너는 지극한 슬픔, 우리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답답함과 부끄러움에 울 것이다.아이야 너는 오늘도꽃을 꺾는 한 어른에게아야해, 그건 아야해작은 풀밭의 나라를 떠나며풀꽃들에게 손을 흔들며안녕 안녕 아이들에게 어른이 되라고 합니다. 어떠 어른이냐면 경쟁에서 이기고, 출세하고, 돈을 많이 벌고, 이름을 날리고, 뭐 그런가요, 다른 사람을 밟고 우.. 2024. 6. 16.
《코뿔소 (Rhinoceros)》 외젠느 이오네스꼬 작, 오증자 역, 이원기·최광일 연출, 극단 전원 1988년 극단 전원 제 4회 정기공연. 이오네스꼬의 대표작품인 공연. 종로 3가 피카데리극장 7층이었던가 8층이었던가, 지금과 같이 지하에 멀티플렉스로 영화관이 운영되기 전에 지상층에 영화관과 함께 공연을 할 수 있는 전용(?) 극장이 있었지 않나 싶습니다. 36년 전 일이다 보니 기억이 정확하지 않겠지요.  이오네스꼬의 희곡 는 1959년에 발표된 부조리극을 대표하는 작품입니다. 프랑스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갑자기 마을 사람들이 코뿔소로 변하기 시작하는 초현실적인 사건을 다룹니다. 마을 사람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코뿔소로 바뀌고 결국 주인공 베렝제만 마을에서 유일하게 코뿔소로 변하지 않은 사람으로 남습니다. 사람이 코뿔소로 바뀌는 것은 인간의 비합리성과 광기를 상징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 2024. 6. 16.
《꽃샘 추위》 이종욱, 창비시선 0028 (1981년 5월) 꽃샘추위 살아서 갚을 빗이 아직 많다새벽 공기를 돌려야 할 집이 아직 많다두드려도 울리지 못하는 가슴이 아직 많다죽어서도 물음을 묻는 무덤이 아직 많다 우리 발에 올가미가 걸릴 때우리 목을 억센 손이 내리누를 때마주보는 적의 얼굴가거라한치도 탐하지 말라몇점 남은 우리 몸의 기름기겨울의 마지막에 아낌없아 불을 당겨겹겹이 쌓인 추위 녹일 기름한치도 탐하지 말라 우리의 머슴이 되지 않으면우리의 주인이 될 수 없다 가져가거라마주잡는 손과 손을 갈라놓는 찬바람꿈에까지 흉측한 이빨자국 찍고 가는 찬바람을씨 뿌린 자가 열매 거둘 날이 가까왔다 번개가 번쩍이는 밤우리는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지 안다갚을 빛이 얼마나 많이 남았는지 안다식중독으로 뜬눈으로 새우는 밤우리는 하늘의 뜻을 버렸음을 깨닫는다무덤 속에서 살아 잇.. 2024. 6.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