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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book)/박노해

《노동의 새벽》 박노해, 풀빛판화시선5 (1984년 9월)

by Sisnaajinii(씨스나지니) 2024.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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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새벽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으로

차가운 소주를 붓는다

이러다간 오래 못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가지

 

설은 세 그릇 짬밥으로

기름투성이 체력전을

전력을 다 짜내어 바둥치는

이 전쟁 같은 노동일을

오래 못가도

끝내 못가도

어쩔 수 없지

 

탈출할 수만 있다면,

진이 빠져, 허깨비 같은

스물아홉 내 운명을 날아 빠질 수만 있다면

아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

죽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이 질긴 목숨을,

가난의 멍에를,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

 

늘어쳐진 육신에

또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가운 소주를 붓는다

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

분노와 슬픔을 붓는다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

세근세근 숨쉬며 자라는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줏잔을

돌리며 돌리며 붓는다

노동자의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

 

  아주 오래 전에 친구 결혼식에 누군가 축가로 '노동의 새벽'을 부르는데 참 자어울리네 첫날밤 치르는 신혼부부에게 그런 생각을 하며 듣고 있었습니다. 박노해 시인이 들으면 '뭐라고?' 했을까요? 

    '박노해 노동의 새벽 20주년 헌정음반'(2004)을 들으며 시집 '노동의 새벽'(1984)을 읽는다. 장사익, 윤도현 밴드, NEXT 등이 '노동의 새벽' 시편들에 곡을 붙여 노래한 앨범이다. '노동의 새벽'은 어두운 새벽빛의 표지다. "노동형제들에게 조촐한 술 한 상으로 바칩니다"라는 시인의 헌사로 시작하고 있다. '노동해방'을 줄여 필명으로 삼은 '얼굴 없는 노동자 시인' 박노해(50)의 시에, 독설로 민중문학론을 설파했던 고(故) 채광석의 기획 및 해설과, 민중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고(故) 오윤의 판화가 어우러져 사회과학 출판사 풀빛에서 출간된 시집이다. '노동'과 '해방'과 '문학'의 접점에서 생산되고 소비되었던 이 시집은 1980년대를 대표하는 한 상징이다. 금서(禁書)로 노동문학의 전범이 되었고, 판매량이 100만부로 추정되고 있으며, 지난 20년간 우리 사회의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친 책 중 한 권이 되었다.'(애송시 100편 - 제61편. 노동의 새벽, 정끝별 시인, 조선일보, 2008.03.19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19/2008031901715.html)

 

[애송시 100편 - 제 61편] 노동의 새벽

애송시 100편 - 제 61편 노동의 새벽 박노해

www.chosun.com

  박노해 시인의 <노동의 새벽>은 올해로 출간 40주년이 됩니다. 노동현장도 87년 ~ 88년을 기점으로 큰 변화를 겪었으며, 그리고 1997년 국가부도사태와 IMF 체제, 2005년 비정규노동법 등을 겪으며 새로운 환경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의 새벽>은 여전히 대한민국과 이 지구별 구석구석 노동현장에 울림을 줍니다.

 

 

대결

 

아눅한 사장실에서

책상을 마구 치며

노조를 포기하라고 

개새기들, 불순분자라고

길길이 날뛰는 저들의 머리 속은

기업주와 노동자는 사슴과 돼지처럼

결코 동드알 수 없다는

계급사상으로 굳건히 무장되어 있는지 모른다

 

묵묵히 일하고 시키는 대로 따르고

주는 대로 받고 성은에 감복하는 복종과 충직만이

산업평화와 안정된 사회를 이루는

훌륭한 노동자의 도리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인간이란

동등하게 존중하며 일치할 때 안정이 있고

민주적이고 평등하게 서로를 받쳐 줄 때

큰 힘이 나온다는 걸

우리는 체험으로 안다

 

돈과 무력과 권력을 전지전능한 하느님으로 믿는 

봉건적이고 독재적인 저들과

온 세상 관계가 평등과 사랑으로 일치되어야 한다고 믿는

민주적으로 단결된 우리와의

이 팽팽한 대결

 

계급사상이 골수에 박힌 저들은

가진 자와 노동자는 사슴과 돼지처럼

別種(별종)으로 구분되기를 원할지 모르지만

그대들이 짓밟고 깨뜨릴수록

우린 더욱더 힘차게

인간으로

평등으로

민주주의로

통일로

솟구치는

갈수록 뜨겁게 달아오르는

이 숙명적인 대결을

어찌한단 말이냐

 

입시일세기 디지털 트랜스포메인션 디엑스 시대에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이념으로 무장한 분들이 새로운 노사관계 확립이란 기치를 내걸고 있는 시절입니다 김치째개에 계란도 말고 술도 말도 민생도 말고 경제도 말고 정치도 말고 외교도 말아 먹는 시절입니다 그래도 대동단결 주인과 주인의식만을 가져야 하는 사람들 이분법 붉게 물든 계급사상 나라를 결단 내고 절멸의 길로 몰아가는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분들 소득이 있는 곳에 세금은 없다 소비를 하는 곳에 세금은 있다 불로소득은 좋은 소득 이 땅 내 땅 저 땅 내 땅 부는 대대손손 물려주어야 목사님게 뺨을 두들겨 맞는 하늘에 계신 그 분이 주신 축보옥

 

 "세상을 시끄럽게 한 '차떼기' 사건으로 우리 국민들은 자존심을 상당히 상하고 땀흘려 일하는 사람들의 근로 의욕을 상실케 했습니다. 기상천외한 수법으로 돈을 건넨 사람들은 대부분 집행유예나 벌금형을 받았습니다. 관대한 처벌의 사유가 '3선 국회의원이고 고령이며 전과가 없다'고 밝히는데, 3선이면 감형 사유닙까. 만약 6선이면 형들 더 감할 수 있습니까? 서정우 변호사의 경우에는 감형사유가 '피고인이 오랫동안 법조인으로 사회에 기여했다'는 겁니다. 심이택 대한항공 부회장의 경우 '전문경인으로서 한직장에서 수십년간 성실하게 재직해 온 점'이 감형사유입니다. 저는 많은 재판을 보지 못했습니다만 '수십 년간 땀 흘려서 농사를 지으면서 우리 사회에 기여한 점을 감안하여 감형한다'거나 '산업재해와 저임금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간 땀 흘려 일하면서 이 나라 산업을 이만큼 발전시키는 데 기여한 공로가 있는 노동자이므로 감형을 한다', 이런 예를 본적이 없습니다. 대한민국 법정에서 '만인(萬人)'이 평등해야 하는데, 과연 평등한가? 나는 '만명(萬名)만 평등하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수십 년간 공직에 있었으면 더 큰 책임과 명예를 가져야 함에도, 이러한 사유가 어떻게 감형 사유가 됩니까? 법원이 땀흘려 일하는 서민들에게도 평등해야 합니다." - 노회찬

 

 

이불을 꿰매면서

 

이불홑총울 꿰매면서

속옷 빨래를 하면서

나는 부끄러움의 가슴을 친다

 

똑같이 공장에서 돌아와 자정이 넘도록

설겆이에 방청소에 고추장단지 뚜껑까지

마무리하는 아내에게

나는 그저 밥달라 물달라 옷달라 시켰었다

 

동료들과 노조일을 하고부터

거만하고 전제적인 기업주의 짓거리가

대접받는 남편의 이름으로

아내에게 자행되고 있음을 아프게 직시한다

 

명령하는 남자, 순종하는 여자라고

세상이 가르쳐 준 대로

아내를 야금야금 갉아먹으면서

나는 성실한 모범 근로자였었다

 

노조를 만들면서

저들의 칭찬과 모범표창이

고양이 꼬리에 매단 방울소리임을,

근로자를 가족처럼 사랑하는 보살핌이

허울좋은 솜사탕임을 똑똑히 깨달았다

 

편리한 이론과 절대적 권위와 상식으로 포장된

몸서리쳐지는 이윤추구처럼

나 역시 아내를 착취하고

가정의 독재자가 되었었다

 

투쟁이 깊어 갈수록 실천 속에서

나는 저들의 찌꺼기를 배설해 낸다

노동자는 이윤 낳는 기계가 아닌 것처럼

아내는 나의 몸종이 아니고

평등하게 사랑하는 친구이며 부부라는 것을

우리의 모든 관계는 신뢰와 존중과

민주주의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잔업 끝내고 돌아올 아내를 기다리며

이불홑청을 꿰매면서

아픈 각성의 바늘을 찌른다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꼭 낭독하며 살아자보자. 변화하는 나를 만나게 될까? 되어야지!!!

 

"저임금과 장시간노동의 암울한 생활 속에서도 희망과 웃음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살며 활동하는 노동형제들에게 조촐한 술 한상으로 바침니다." - 박노해(1984년 타오르는 5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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