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소년 소녀가 살아있다. 돌아보면, 인간에게 있어 평생을 지속되는 '결정적 시기'가 있다. 그 첫 번째는 소년 소녀 시절이다. 인생 전체를 비추는 가치관과 인생관과 세계관의 틀이 짜여지고, 신생(新生)의 땅에 무언가 비밀스레 새겨지며 길이 나버리는 때, 단 한 번뿐이고 단 하나뿐인 자기만의 길을 번쩍, 예감하고 저 광대한 세상으로 걸어나갈 근원의 힘을 기르는 때. 그때 내 안에 새겨진 내면의 느낌이, 결정적 사건과 불꽃의 만남이, 일생에 걸쳐 나를 밀어간다.
내가 커 나온 시대는 어두웠고 가난했고 슬픔이 많았다. 다행이 자연과 인정(人情)과 시간은 충분했다. 그때 우리는 혼자가 아니었다. 가난과 결여는 서로를 부르고 서로를 필요로 하게 했다. 쓸모 없는 존재는 한 명도 없었다. 노인들도 아이들도 제 몫의 일들이 있었고, 대지에 뿌리박은 공동체 속에서 우리 각자는 한 인간으로 강인했다.
선대(先代)의 낡은 관념과 관습이 얼음강처럼 짜개지던 속에서도 우리는 인간의 도리와 원칙, 감사와 책임, 절제와 헌신을 익혔고 스스로 자기 앞가림하는 능력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배웠다. 야생의 감각과 여백의 자유와 따뜻한 심성의 인간적 풍요를 누렸다.
그리고 간절함, 간절함이 살아있었다. 기다림과 견디는 힘이 살아있었다. 모두가 내일은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것이 고난 속에서도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었다.
그리고 다시 시대가 격변하고 있다. 전능한 기계 인간이 도래하고 인간은 기계가 되어가는 시대. 그러나 문명의 급진보다 더 빠르고 무섭게 인간 그 자신이 급변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정리하고 성찰할 틈도 없이, 갈수록 시간은 더 빠르게 나를 휩쓸고 지나쳐간다.
너무 과열되고 너무 소란하고 너무 눈부신 이 진보한 세계 가운데서 우리 몸은 평안하지 못하다. 우리 마음은 늘 초조하고 불안하여 안식하지 못한다. 아이들조차 성공을 재촉당하고 과잉된 보호와 기대 속에 스스로 부딪치고 해내면서 제 속도로 자라지 못한다.
세상은 하루하루 독해지고 사나워지고, 노골적인 저속화와 천박성이 우리 영혼을 병들게 하는 지금, 우리는 우울과 혐오와 무망(無望)의 감정에 휩싸여 있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 깊은 물음이 울려올 때면 나는 내 안의 소년을 만난다. 간절한 마음과 강인한 의지가 살아있던 눈물꽃 소년으로 돌아가 다시 힘을 길어 올린다. 나의 유산은 결여와 상처, 고독과 눈물, 정적과 어둠이었다. 어둠 속에 빛나는 것은 밤하늘의 별빛만이 아니었다. 사람이 빛나고 있었다. 그 눈빛이 빛나고 있었다. 어둠에 잠긴 사유가, 간절한 마음과 의지가 빛나고 있었다. 그렇다. 깊은 어둠에 잠겨 살아온 내 마음에는 어둠이 없었다. 어둠이 잉태한 그 무엇이 비밀히 자라고 있었고 어둠 속에 길을 찾는 내 눈동자는 빛이 되었다.
'경험하는 나'와 '기억하는 나'는 다르다. 기억은 또 해석과 표현에서 달라진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떻게 기억하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경험과 기억을 품고 오늘 여기에서 진실을 살아내는 것이다. 내가 가진 단 하나의 확실한 근거는 '내 살아온 동안'이라는 나의 기억, 나의 역사이다. 그 불꽃의 만남과 상처의 통증과 내밀한 각성이 내 안에 생생히 흐른다. 이것이 내가 나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며, 나만의 길을 갈 수 있는 힘의 근원이다.
인류의 가장 중요한 유산은 이야기다. 자기 시대를 온몸으로 관통해온 이야기, 자신만이 살아온 진실한 이야기. 그것이 최고의 유산이다. 돌아보면, 내가 진정으로 살았구나 기억되는 순간은 영혼의 순수가 가장 빛나던 시간, 삶의 정수만을 살았던 소박하고 순정하던 날들이었으니. 언뜻 은밀하고 무심하던 어린날의 시간이 실상 가장 밀도 높고 충만한 생의 시간이었고 거의 잊히지 않는 나의 결정 체험이, 아직 풀리지 않는 생의 신비가, 굽이쳐온 생의 원점이 빛의 계단처럼 놓여있으니.
길 잃은 날엔 자기 안의 소년 소녀로 돌아가기를.
아직 피지 않은 모든 것을 이미 품고 있던 그날로,
넘어져도 다시 일아나 앞을 향해 달려나가는
영원한 소년 소녀가 우리 안에 살아있으니.
그날의 소년이 오늘의 너에게 눈물꽃을 건넨다.
- 박노해 <눈물꽃 소년.에서
시인의 말처럼 내 안에 소년이 살아있습니다. 희미해지고 지워져 가는 기억들 속에 형산강 물줄기 따라, 그리고 서울의 첫 기억들, 쉬운 때가 있었겠습니까? 힘들과 좌절하고 싶을 때 어려 살았던 동네를 거닐며 그 때 꿈 많았던 소년을 만나 위로 받고 다시 일어나곤 했었습니다. 언제가 제 이야기들도 글로 옮겨 보고 싶어지는 밤입니다.
'책(book) > 박노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동의 새벽》 박노해, 풀빛판화시선5 (1984년 9월) (3) | 2024.06.22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