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에서 관계로, 성장에서 성숙으로 가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신민이나 고객이 아닌 시민이 되어야 한다.
프롤로그
교사는 어떤 어른이어야 하는가? 무엇보다 근본에 충실해지는 것이다. 학생들을 민주공화국의 구성원, 민주시민이 되도록 하는 것! 민주시민성은 주체성, 비판성, 연대성으로 구성된다. 학생들은 자율적 주체가 되도록 하며 그 어떤 권력에도 자발적으로 복종하지 않도록 비판력을 갖도록 하며 서로 연대하도록 이끌어가는 것.
1. 체육복을 입고 학교에 오는 아이들
아이들은 자기 앞길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 할 텐데 그럼 교사들은 미래를 속단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스스로 자기 앞길을 개척할 수 있게끔 용기를 북돋워 주고 스스로를 귀하게 여길 수 있게끔, 또 세상 앞에서 당당히 설 수 있게끔 마음으로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교사와 학생의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와 환대 그리고 인정 어린 부분이라고 늘 생각헤 왔습니다. (이원재)
2. 아빠, 왜 프랑스 애들은 나를 때리지 않죠?
우리 헌법을 보더라도 자유권은 신체의 자유, 저는 몸의 자유라는 말을 선호합니다만, 신체의 자유로부터 시작이 되지요. 그런 다음 사상의 자유, 양심의 자유, 출판, 결사의 자유 등 근대의 시민들 각자가 자기자신을 형성하기 위한 여러 자유가 제기됩니다. 요컨대 자기형성의 자유의 출발점이 몸의 자유, 신체의 자유인데 한국은 이 신체의 자유에 대한 신성함까지는 아니더라도 중요성에 대한 인식 자체가 부재하지 않은가 싶은 겁니다. 워낙 근대국가 형성과 관련하여 분단 상황 아래 학살과 고문이라는 엄청난 국가폭력이 자유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역설의 땅이었으니까요. 학살과 고문은 신체의 자유의 가장 엄중한 한계인데, 이 행위를 국가가 앞장서서 거리낌없이 저지른 땅이었어요. 이와 같이 몸의 자유에 대한 인식은커녕 그것을 배반한 현대사가 골목뿐만 아니라 가정폭력, 학교폭력 등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생각되는 거예요. 최근 들어 한국에서도 가정폭력, 학교폭력 등에 대한 문제점들이 강조되고 있는 상황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긴 하나 언어폭력은 SNS 등을 통해 확산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홍세화)
똘레랑스의 가치가사회 안에 뿌리내리는 게 쉽지 않습니다. 성찰이성이 성숙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똘레랑스를 풀어서 차이를 존중하라, 차이를 차별이나, 혐오, 억압 또는 배제의 근거로 삼지 말라는 성찰이성의 소리라고 말할 수 있는데, 한국 사회가 성찰이성이 성숙된 사회라고 하기엔 갈 길이 한참 멀다는 걸 부인할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이 다 달라서 차이를 존중하면 모든 사회구성원이 존중받을 수 있을 텐데 그렇기는커녕 차별, 혐오, 억압, 베제가 곳곳에서 횡행하고 있습니다. 똘레랑스의 가치가 결여되어 있는 만큼 온유함과 섬세함도 사라지고 있는 사회라고 말하고 싶어요. 온유함과 섬세함이 없으니까 갈등이나 문제가 생길 때 이걸 단순화, 극단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간은 본디 몹시 복잡한 존재인데 말입니다. 저는 이런 모습을 양극화된 정치의 사회적 현상으로 보기도 합니다. 가령 근본을 따져 묻는 것을 영어로 라디칼(radical)이라고 쓰는데 한국에서는 이것이 극단적(extreme)이 돼요. "radi"가 어원상 "뿌리"를 뜻하므로 radical은 근본을 캐는 정신이랄까 그런 것인데 이런 것이 한국에서는 찾기 어렵고 거의 극단적으로 치닫습니다. 한국사회는 이미 설득하기보다 선동하기가 더 쉬운 사회가 되었어요. 지금 정치 현실도 그렇고 학교폭력 문제에 대해서도 섬세함, 온유함의 바탕에서 근본을 따져 묻지 않고 단순, 극단화해 그저 법에 기대어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는 식의 작용-반작용의 사회가 돼버린 것 같아요. 인간은 복잡한 존재인데 사회가 무척 단순화의 길을 가니 그 사회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치어버리는 형국이라고 할까요? (홍세화)
3. 잘 모르겠어요.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한국의 교육, 파행이라고 해애 할지, 본질에서 많이 벗어나 엄청나게 왜곡됐다고 해야 할지, 이렇게 된 것에 대해 일제 강점기에 근대식 교육이 자리 잡혔는데 그것이 해방이 된 이후에도 분단과 전쟁으로 극복할 수 없었던 점을 우선 꼽습니다. 헌법 제1조가 말하듯이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면 대한민국 공교육의 일차적 소명은 국민을 민주공화국의 구성원, 즉 민주시민으로 육성하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이 소명이 실종된 채로 지금에 이르렀어요. 일제 강점기 35년을 보내고 마침내 해방이 됐고 민주공화국을 선언했어요. 그러면 새로 건설한 새나라에서 어떤 교육을 어떻게 구성해서 새로운 시민을 육성할 것인지를 놓고 대대적인 토론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없었습니다. 전혀 없었고 오히려 일제부역세력이 분단상황을 타고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되었는데 교육 부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민주시민 교육은 이루어질 수 없었고 일제 강점기의 전체주의적 신민교육이 답습되었습니다. 여전히 학생들에게 교복을 강제로 입히고 있는 것, 학교의 구조가 병영의 구조를 띠고 있는 것, 운동장은 연병장에, 수위실은 위병소에, 조회대는 사열대에 일대일로 조응되는 것 말입니다. 유럽에서도 군국주의 시절에는 학교가 병영처럼 존재했지만 이른바 자유민주주의 시대가 오면서 학교 구조도 바뀌었는데, 우리는 그런 변화가 없는 채로 세월을 보내다가 1990년을 전후하여 신자유주의가 교육제도에도 침윤해 들어왔어요. 신민교육이 극복되지 않은 채 신자유주의가 얹히니 좀 심하게 말해 괴물과 같은 모습을 띠게 된 거죠. 그런 것 중의 하나가 학생들이 신민에서 시민이 되는 대신 고객, 소비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보다 훨씬 자유분방한 유럽의 교실에서 학생이 내보란 듯 잠을 잔다? 보기 어려운 광경입니다. 왜? 그들은 신민도 고객도 아닌 시민이고 시민에게는 자유와 권리를 누리는 만큼 시민으로서 책무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홍세화)
4. 즉자적 자아에서 대자적 자아로
우리가 왜 국어 교육을 하는지 물으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말하기와 듣기 능력, 읽기와 쓰기 능력, 그 다음에 문학에 대한 이해력을 갖추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독서는 사람을 풍요롭게 하고 글쓰기는 사람을 정교하게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존재라고 하지만 우리 생각은 거의 다 안개 속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글쓰기를 통하여 자기 생각을 정리하고 되짚어보는 과정을 통해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기를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즉자적 자아에서 대자적 자아로 나라갈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글쓰기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안데 한국의 학교에는 생각하는 교육이 거의 없는 거예요. 학생들을 생각하도록 이끌기 위해 학생들이 필연적으로 해야 하는 게 글쓰기와 말하기 즉 토론입니다. (홍세화)
5. 좋은 어른이란 자신이 미완의 존재임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굳이 어른이 되어야 하는가, 라고할 때 자기 변화, 자기 성숙의 여지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겠지요.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나의 현존재가 미완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데서 그 가능성이 열릴 것입니다. 제 부족한 생각으로 말씀드리자면 스스로 미완의 존재임을 의지로 붙들어야만 해요. 우리가 죽는 순간까지 완성된 존재일 수 없다면 자신의 잘못된 점, 부족한 점에 대한 부단한 성찰을 통해 수정하거나 보충해가는 그런 긴장을 유지하는 개 필수적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거울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 그런 자세가 참된 어른이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홍세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이냐? 그래도 모색하고 실천에 옮겨야죠. 어려운 상황이기에 더욱 열심히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광신자들이 열성을 보이는 것도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지혜로운 사람이 열성을 보이지 않는 것 또한 수치스러운 일이다(볼테르).",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한다(로맹롤랑).", "우리가 가는 길이 어려운 게 아니라, 어려운 길이므로 우리가 가야한다(홍세화)". 실제로 세상은 갈수록 비관적입니다. 이런 비관적 전망 앞에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고 냉소하지도 않으며 모색하고 참여하고 실천하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숙명과도 같은 과제일 것입니다. (홍세화)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4041814482840341?utm_source=naver&utm_medium=search
"이 책은 홍세화 선생님을 추모하기 위해, 2023년에 출간한 <교사는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하나요>라는 책을 다시 구성한 것입니다. 제가 아는 가장 소년 같았던, 수줍은 미소를 잘 지었던, 누구보다도 겸손했던 한 어른의 명복을 빕니다."
* 이 책에 대한 아쉬움. 이원재 선생님은 학생들을 '아이'라고 호칭합니다. 5.16 군사 반란 이후, 본격적인 산업화를 거쳐 90년대를 들어서며 청년 학생은 '아이'가 인식 되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사회에 나가 성인으로서 삶을 꿈꾸던 청년이 어느 순간 사회의 보호를 받아야 할 '아이'로 여겨지게 된 것입니다. 아마 이원재 선생님도 학창시절을 '아이'로 보냈기에, 청년 학생들을 그렇게 부르는 것이 익숙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사회에서, 민주공화국의 민주 시민으로 살아가려면, '아이'에서 '청년'으로 스스로 거듭나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새벽별을 보고 등교해 네모난 상자에 갇혀 있다가 밤늦게 귀가하는 아이가 아니라, 공부는 학원에서만 하는 세상이 아닌, 다양성을 체득하고 창의적이며 주체적인 청년으로 학창 시절을 보내야 하지 않을까요?
* 학교에서 헌법(시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과 유엔 인권 선언, 국어(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 그리고 예체능 교육을 바탕으로 유아부터 청년시절, 나아가 평생 교육을 한다면 더 나은 민주시민들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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