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시는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김수영은 자신의 향상에 도움이 되는 공부, 자기가 흥미를 가지고 할 수 있는 공부가 아니면 하지 않았다. 김수영은 어떤 관습보다, 어떤 사회적 평판보다 자신의 자유의지가 결정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인생 항해 키를 움직였다('길 위의 김수영'에서).
김수영이 힘 주어 말한 "우리 문단에도 해방 이후 짧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가장 자유로웠던, 좌우의 구별 없던, 몽마르트 같은 분위가 있던" 곳이 바로 '마라서사'였다('길 위의 김수영'에서)
'질서가 너무 난잡한 것도 보기 싫지만 질서가 이처럼 너무 잡혀 있어도 거북하지 않은가?' 이런 의문이 물방아처럼 그의 머릿속에서 돌기 시작하는 것이다('길 위의 김수영'에서)
해방 후 임화 작사, 김순남 작곡의 <인민항쟁가>는 서울의 여기저기에서 그 폭발적 감성을 불러일으켰다. '원수와 더불어 싸워서 죽은/우리의 죽음을 슬퍼 말아라/깃발을 덮어 다오 붉은 깃발을/그 밑에서 전사를 맹세한 깃발'. 이 노래는 훨씬 뒤 1960년 4월 혁명 직후의 명동 술집 '은성'에서 김수영이 술 취해서 불러 대는 것을 내가 입을 틀어막아 버리며 "노래 부를 태면 술 취하지 않은 때 거리로 나가 부르시오."하고 대든 적이 있었다('길 위의 김수영'에서, 고은 '아! 고은')
김수영은 중세봉건시대처럼 뒤에서 즐긴 건 다 즐기고 겉으로만 체면을 중시하는 양반의 이중성 같은 행태는 모던한 사회를 살아가는 시인이 가져야 하는 모더니티 정신에 위배된다고 생각했다. 욕망도, 설사 비열한 욕망일지라도 솔직하게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허균이 "남녀 간의 정욕은 하늘이 준 것이며, 남녀유별의 윤리는 성인의 가르침이다. 성인은 하늘보다 한 등급 아래다. 성인을 따르느라 하늘을 어길 수는 없다."라고 말하며 시대를 앞서는 근대정신을 보였다면, 김수영은 충실하게 삶에서 실천했다고 할 수 있다('길 위의 김수영'에서)
시를 쓰든가, 무엇을 하든가 역사적인 눈을 가져야 한다('길 위의 김수영')
김수영의 매력은 압박감에 짓눌려 밀실로 도망쳐 발언을 삼가는 것이 아니라 바람보다도 빨리 일어나는 풀처럼 일어나 발언을 멈추지 않는다는 데 있다. 김수영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지식인의 사회참여'에 대한 고민과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모든 살아 있는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이라고 외쳤고, "최고의 문화 정책은, 내버려 두는 것이다 제멋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다."라고 외친 것이다(길 위의 김수영'에서)
6·25 전쟁이라는 지옥의 터널을 지나온, 6·25 이후 우리 문단에서 6·25 전쟁의 가장 밑바닥을 경험한, 지옥의 터널 끝에서 끝내는 미치지 않았고, 폐허에 가득찬 허무주의에서 끝내는 빠져나왔으며, 인간성의 마지막 끝에 서서 자유를 노래했고, 민주를 노래했고, 북을 저주하지 않고 남과 북의 화해를 노래했다. 우리가 겪을 수 있는 최악의 비참을 경험한 시인이 부르는 희망과 사랑의 노래는 우리 민족 구성원 모두에게 6·25가 가져다준 인간성 상실의 마지막 끝에서 한 가닥 희망을 붙들 수 있는 메시지가 되었다('길 위의 김수영'에서)
모더니즘의 본질은 겉치레가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 '예술가의 양심'에 투철해야한다. 시작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시의 형식은 내용에 의지하지 않고 그 내용은 형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 바로 그처럼 형식은 내용이 되고 내용은 형식이 된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길 위의 김수영'에서)
남편 수영은 모든 작픔에 사력을 다했어요. 쉽게 쓴 시가 없어요. 시 한편 쓰는 데 고민을 정말 많이 했어요. 작품이 완전 새로워야 하고 자신을 극복해야 한다는 강박이 강했어요. 정말 수영의 정서와 치열함은 보통 사람이 도저히 쫓아갈 수 없을 정도로 저 멀리 있었어요. 수영의 문학정신은 절대 자유이고 절대 사랑이며 절대 자연이라고 할까요. 그리고 시를 대하는 태도가 보통 정직한게 아니었어요('시인 김수영과 아방가르드의 여인')
시인 김수영과 아방가르드의 여인 김현경
현경이 기억하는 시인 김수영과 첫 만남은 1942년 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진명고등여학교 3학년이었던 현경은 그날 오후 몰래 학교를 빠져나왔다. 소위 '땡땡이'를 친 것이다. 그때였다. 봄 내음 가득한 거리에서 푸르른 하늘과 5월의 봄볕을 만끽하고 싶었던 현경은 가방을 들고 학교 근처 효자동 거리로 나섰다. 그때였다. 어떤 남자 둘이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이종구 옆에 서있던 유학생 복장의 학생과 인사를 나눴다. 그 학생이 바로 김수영이다. 이때의 현경과 수영의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두 사람이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은 2년 정도 지난 시점인 1944년 2월이다('시인 김수영과 아방가르드 여인'에서).
현경이 이성으로서 수영을 대하지는 않았다. 또 그런 감정을 가지지 않았다. 요새 말로 치자면, 현경에게 있어 수영은 '내 스타일'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현경이 수영을 부르는 호칭은 '아저씨'였다. 다만 수영의 시를 볼 때면 자신보다 더 높은 경지에 있는 것 같아 경외심이 절로 일었다('시인 김수영과 아방가르드 여인'에서)
그러고선 이튿날 새벽같이 돈암동 집으로 찾아왔다. 신발 신은 채 현경의 방으로 들어오려 하자 안방에 있던 어머니가 급히 나와 제지했다. 어머니가 수영을 알아봤다. "어! 자네 왜 이러는가? 아직 새벽인데." 그 소리에 이불 속에 있던 현경이 놀라 일어났다. 잠시 후 수영이 어머니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얼마 전에 현경이가요 ... 어떤 뺘다귄이지 모르는 말 뼈다귀 같은 놈하고 명동에서 손을 잡고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아세요." 막 따지듯이 말했다. 그럼에도 어머니가 "자네! 신발이나 벗게. 그렇다고 새벽같이 와서 화를 낼 게 뭐 있느냐." 하면서 타일렀다. 잠시 후 수영이 무안한 표정이 되어 맥없이 물러갔다.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수영이 다시 돈암동 집에 찾아왔던 것이다. 총격 사건이 생긴 지 두어 달이 지나서였다.수영이 신발도 안 벗고 툇마루 끝에 앉았다. 그러자 어머니가 말했다. "자네, 신발도 안 벗고 있어. 올라와서 차라도 한잔하지." 그 말에도 그냥 마루 끝에 앉아 미동이 없자 어머니가 현경을 나오게 했다. 툇마루 옆에 앉자마자 현경이 물었다. "웬일이에요?" 그랬더니 수영의 첫마디가 뜻밖이었더. "문학하자!" 너무나도 짧은 4음절의 말이다('시인 김수영과 아방가르드의 여인'에서).
해가 바뀌고 1948년에 접어들면서 두 사람은 점점 연인이 되어갔다. 강렬한 태양이 내리쬐는 여름날이었다. 날이 얼마나 더웠던지 숨이 막히는 날씨였다. 한참을 가다 보니 그곳에 얇고 넓은 물웅덩이가 있었다. 물이 맑아서 바닥까지 훤히 보이는 물웅덩이였다. 현경은 무더위에 지쳐 있었던 터라 부끄러움을 잊은 채 훌훌 원피스를 벗었다. 그리고 속옷마저 던지고 알몸으로 물속에 텀벙 뛰어들었다. 그 광경에 수영이 감짝 놀랐다. 난처한 표정이었지만 이내 수영도 현경을 따라 알몸이 되어 물속에 뛰어들었다. "당신은 아방가르드한 여자야. 어디서 그런 실험 정신이 나왔어?" ('시인 김수영과 아방가르드 여인'에서)
수영의 치질 자리가 겨우 아물어서 지팡이 집고 다닐 만하게 되었다. 발병한 뒤 어느덧 두어 달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지나갔다. 벌써 가을이 오고 있었다. 하루는 수영이 지팡이 짚고 외출을 한 뒤 현경더러 잠깐 얘기하자고 했다. "소문이 괴기하더라. 너하고 동거하고 있다는 게 문단에 쫙 퍼졌더라고. 만약 배인철 사건 재수사를 하면 내가 진짜 범인으로 덤터기 쓸지도 몰라. 너는 집에 들어가 있는 것이 좋겠어," 현경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자신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하는 수영의 그 말이 송곳처럼 가슴을 후볐다. '결국 나는 낙인이 찍힌 여자가 됐구나!' 고생스러웠지만 수영을 돌봤던 그 시간이 행복했었는데, 이마저도 허락되지 않는 게 너무 서글펐다. '이제는 끝이구나. 나는 또 이별을 하는구나." 현경은 아무런 말 없이 짐을 싸고 돈암동으로 향했다. 일종의 오기 같은 심정이었던자 수영 앞에서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시인 김수영과 아방가르드의 여인'에서).
종로 4가 전차 정류장에서 전차를 기다리고 있을 때 누군가가 현경의 손목을 잡았다. 놀랍게도 수영이었다. 헤어진 진 몇 달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수영이 말했다, "내가 지금 서울대학 부속 간호학교에 야간부 선생으로 영어 가르치러 가는 길인데, 수업이 두 시간이야. 내가 수업을 최대한 당겨서 한 시가만에 나올 테니까 잠깐만 여기서 한 시간 정도만 앉아서 기다려 줘." 그러면서 현경을 데리고 서울대학 병원 쪽으로 걸었다. 간호학교 앞의 작은 벤치. 그 벤치에 앉아서 현경은 수영을 기다리며 들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야릇한 설렘에 전율이 일었다. 이 우연한 만남이 인연 같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수영과 헤어져 있는 동안 가끔씩 불쑥 심장 위로 솟구친 자리에 남아 있던 감정의 찌꺼기가 무엇이었는지 분명히 알 것 같았다.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수영이 저 멀리서 걸어오는 게 보였다. 기다린 지 1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수영이 다가와 얘기했다. "그냥 일찍 끝내고 나왔어. 오늘이 월급날이야!" 그러면서 현경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현경은 수영의 엷은 미소에 설렜다. 그 순간 수영이 가까이 다가와 현경의 팔을 잡고 속삭였다. "My soul is dark." 바이런의 시였다. 그 말에 현경의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짙은 그리움으로 부유했던 수많은 감정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듯했다. 현경이 그대로 수영의 품에 안겼다('시인 김수영과 아방가르드의 여인'에서).
남부민동 집에 수여이 한번 왔었다. 일요일이었다. 현경의 사정과 마음을 수영이 좀 눈치를 챈 것 같았다. 이종구와 현경이 겸상을 해서 막 밥을 먹으려는데 수영이 찾아온 것이다. 갑자기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세 사람 모두 침묵했다. 몇 시간이 그렇게 흐릊 밥공기 위의 밥알이 말라서 굳어질 정도였다. 오랜 침묵을 깨고 수영이 한마디 던졌다. 역시 이번에도 수영의 짤은 한마디였다. "가자!" 그 한마디에 곧바로 따라나서지 못했다. 아니 보따리를 쌀 수는 없었다. 마음이 복잡했고 난처했다. "저기 내가 나중에 갈게요. 먼저 가세요!" 현경은 궁색한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현경의 말에 수영이 한마디 더 내뱉었다. 이번에는 이종구에게 한 말이었다. "자네! 이러면 안 되지." 그렇게 두 번의 짧은 말을 던지고 수용이 나갔다. 현경은 어깨가 처진 수영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힘이 없어 보였지만 뒷모습이 참으로 당당해보였다('시인 김수영과 아방가르드 여인'에서).
나는 올해 서른네 살이 되었고 어머니 없는 아이가 하나 있다. 나는 돈도 없고 재주가 없으니까 뜻이 아닌 독수공방을 지키고 있지만 '아프레게르'의 물이 든 여자는 새로 사내를 얻어 버렸다. 내가 경제적으로 어린애를 '사포-트'할 때까지 외할머니에게 맡겨 놓자는 여자의 말대로 다섯 살이 된 사나이 놈은 시골 외갓집에 내버려 두고 나는 나대로 여전히 술만 마시고 있다. 막연한 환상을 가졌던 사회주의 사회 북한은 자신에게 의붓자식 같은 설움만 안겨 주었다. 포로수용소에서는 친공 포로와 반공 포로의 극렬한 이념 대립 속에 인간 목숨은 파리 목숨보다 못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자신이 존경하던 임화는 남로당파 숙청 과정에서 숙충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신시론' 동인으로 모더니즘 시 운동에서 마음이 맞았던 동지들은 전부 월북해 버렸다. 그리고 또 가장 전위적으로 결혼식이라는 거추장스런 격식조차 거부하며 시대를 앞서가는 남녀의 결합 모델을 보여 주는 데 기꺼이 같이했던 부인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조차 친정에 맡겨 버리고 다른 남자와 동거에 들어가 버렸다. 마음 기댈 언덕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김수영은 술만 먹으면 거의 미친 발작을 일으켰다. 그날부터 둘은 부부가 되었다('길 위의 김수영'에서)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두 사람이 만난 자리에서 수영은 또다시 한마디 말로 현경을 격동시켰다. "나가자!!" 그 말에 현경은 수영의 손을 잡고 삼선교 일대를 돌았다. 아무런 말이 필요 없었다. 산책을 하다 날이 저물었을 때도 다른 말들이 불필요했다. "제가 방 하나 얻어놨는데 ....", "그리로 가자!" 현경이 머물고 있던 성북동의 작은 집으로 향했고, 그날부터 현경과 수영은 다시 부부가 되었다(시인 김수영과 아방가르드의 여인'에서)
한번은 잡지 <희망>에서 뜻밖의 제안을 했다. "김 선생! 에로소설 하나 써 오면 바로 현찰로 드릴게요." 이일을 귀가해 현경에게 알렸다. "여보! 그런 것 쓰면 현찰로 바로 준다는데 쓸 수 있겠어?" 이에 현경이 "가져와 보세요. 제가 써 줄게요."라고 선뜻 나섰다. 80매 정도의 짧은 소설을 수영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소설 원고를 전하면 바로 현찰을 받는다는 생각에 시장 쇼핑 리스트를 1, 2, 3, 4로 나누어 적은 메모지도 함께 건넸다. 수영은 원고료 일부를 떼어 술 한잔할 생각이었던지 기분 좋게 원고 봉투와 메모지를 받아 나갔다. 그런데 밤이 되어도 수영이 돌아오지 않았다. 통금 시간이 다 되었을 때에야 멀리서 인기척이 났다. 수영이었다. 수영은 완전히 취한 상태로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뭐 같은 년! 세상에 더러운 년! 내가 이런 더러운 년하고 살았단 말이야! 야, 이년아! 어떻게 해서 그런 망측한 생각을 했느냐 말이야!"수영의 주정을 들으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이고! 그 돈을 술로 다 날려 먹었구나! 아, 저 웬수! 저런 사람하고 살기에는 너무 억울해. 내일 아침 당장 이혼해야지. 아니 내가 저런 사람하고 같이 살아서 무슨 덕이 있을까? 내일 아침에는 이혼을 해야지.' 할 것은 다 하고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미음을 만들어서 쟁반에 들고 들어갔다. 쟁반째 그냥 던져주고 나오려 했는데 수영이 벌떡 일어났다. 그러면서 바로 나가려는 현경을 붙잡았다. "여보! 잠깐 앉아 봐!" 앉아 보라는 그 말에 엉겹결에 수영 옆에 앉았다. "어제 내가 그 원고를 보고 너무 망측해서 난로애 넣으려고 했어. 어쩌다 보니 얼떨결에 원고료를 받았는데 너무 속이 상해 그만 출판사 가까운 데서 한잔 먹었어. 그리고 무교동에서 먹고 또 광화문 뒷골목에 가서 한잔 더하다 보니 그만 원고료를 다 날리고 들어왔어. 그런데 우리가 그런 소설까지 쓰고 밥을 먹어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건 아니다. 이제 서푼짜리 전쟁 비한인드 스토리 이런 거 이제 안 쓰려고 한다. 미안하다. 우리 그런 것 쓰면서 밥 먹지는 말자." 현경은 수영의 진지하고도 솔직한 얘기를 들으면서 마음이 많이 풀어졌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림자에조차 의지하지 않는다."라고 강변하는 수영의 문학관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던 현경이었다. 그리고 너무나도 솔직하게 사과하는 수영에게 고마웠다. 대답 대신 수영의 무릎 위로 살짝 앉았다. 그러자 수영이 현경을 꼭 안아주었다('시인 김수영과 아방가르드의 여인'에서)
상주사심(常住死心)
상주사심은 늘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라, 이런 뜻이지, 늘 죽는다는 생각을 하면, 지금 살아 있는 목숨을 고맙게 생각하고 아름답게 살 수 있어('시인 김수영과 아방가르드의 여인'에서).
<길 위의 김수영>은 시인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며 시인이 머문 장소 마다 남긴 사연을 쫓아 가며 자연스럽게 김수영 삶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습니다. <시인 김수영과 아방가르드의 여인>은 열정의 사랑 없이는 위대한 시인이 탄생할 수 없다는 믿음과 그 믿음의 출발점으로 나온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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