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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지성시인선3

《혼자 가는 먼 집》 허수경, 문학과지성 시인선 0118 (1992년 5월) 불우한 악기 불광동 시외버스터미널초라한 남녀는술 취해 비 맞고 섰구나 여자가 남자 팔에 기대 노래하는데비에 젖은 세간의 노래여모든 악기는 자신의 불우를 다해노래하는 것 이곳에서 차를 타면일금 이 천원으로 당도할 수 있는 왕릉이 있다네왕릉 어느 한 켠에 그래, 저 초라한 벗은젖은 알몸들이김이 무럭무럭 나도록 엉겨붙어 무너지다가문득 불쌍한 눈으로 서로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 굴곡진 몸의 능선이 마음의 능선이 되어왕릉 너머 어디 먼데를 먼저 가서그림처럼 앉아 있지 않겠는가 결국 악기여모든 노래하는 것들은 불우하고또 좀 불우해서불우의 지복을 누릴 터 끝내 희망은 먼 새처럼 꾸벅이며어디 먼데를 저 먼저 가고 있구나 허수경 시인의 '불우한 악기'는 삶의 불우함과 고독을 담담하게 그려냅니다. 비에 젖은 남녀가 서로 기.. 2024. 10. 20.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한강, 문학과지성사 시인선 0438 (2013년 11월) 괜찮아 테어나 두 달이 되었을 때아이는 저녁마다 울었다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디가아파서도 아니고아무 이유도 없이해질녘부터 밤까지 꼬박 세 시간 거품 같은 아이가 꺼져벌릴까 봐나는 두 팔로 껴안고집 안을 수없이 돌며 물었다왜 그래.왜 그래.왜 그래.내 눈물이 떨어져아이의 눈물에 섞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문득 말했다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괜찮아.괜찮아.이제 괜찮아. 거짓말처럼아이의 울음이 그치진 않았지만누그러진 건 오히려내 울음이었지만, 다만우연의 일치였겠지만며칠 뒤부터 아이는 저녁 울음을 멈췄다 서른 넘어야 그렇게 알았다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어떻게 해야 하는지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괜찮아왜 그래,가 아니라괜찮아.이제 괜찮아. 한강 시인의 시 「괜찮아」는 아이가 저.. 2024. 10. 13.
《즐거운 日記(일기)》 최승자, 문학과지성 시인선 040 (1984년 12월) 언제가 다시 한번 언젠가 다시 한번너를 만나러 가마.언젠가 다시 한번내 몸이 무덤에 닿기 전에. 나는 언제나 너이고 싶었고너의 고통이고 싶었지만우리가 지나쳐온,아직도 어느 갈피에선가흔들리고 있을 아득한 그 거리들. 나는 언제나 너이고 싶었고너의 고통이고 싶었지만그러나 나는 단만 들이키고 들이키는흉내를 내었을 뿐이다.그 치욕의 잔끝없는 나날죽음 앞에서한 발 앞으로한 발 뒤로끝없는 그 삶의 舞蹈(무도)를다만 흉내내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너를 피해달아나고 달아나는흉내를 내고 있다.어디에도 없는 너를 피해. 언젠가 다시 한번너를 만나러 가마언젠가 다시 한번내 몸이 무덤에 닿기 전에. (이 세계의어는 낯선모퉁이에서네가 나를 기다리고 있기에) 최승자 시인의 시 '언젠가 다시 한번'은 깊은 상실감과 그리움.. 2024.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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