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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book)/문학과지성 시인선

《즐거운 日記(일기)》 최승자, 문학과지성 시인선 040 (1984년 12월)

by Sisnaajinii(씨스나지니) 2024.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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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가 다시 한번

 

언젠가 다시 한번

너를 만나러 가마.

언젠가 다시 한번

내 몸이 무덤에 닿기 전에.

 

나는 언제나 너이고 싶었고

너의 고통이고 싶었지만

우리가 지나쳐온,

아직도 어느 갈피에선가

흔들리고 있을 아득한 그 거리들.

 

나는 언제나 너이고 싶었고

너의 고통이고 싶었지만

그러나 나는 단만 들이키고 들이키는

흉내를 내었을 뿐이다.

그 치욕의 잔

끝없는 나날

죽음 앞에서

한 발 앞으로

한 발 뒤로

끝없는 그 삶의 舞蹈(무도)를

다만 흉내내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너를 피해

달아나고 달아나는

흉내를 내고 있다.

어디에도 없는 너를 피해.

 

언젠가 다시 한번

너를 만나러 가마

언젠가 다시 한번

내 몸이 무덤에 닿기 전에.

 

(이 세계의

어는 낯선모퉁이에서

네가 나를 기다리고 있기에)

 

최승자 시인의 시 '언젠가 다시 한번'은 깊은 상실감과 그리움을 담고 있습니다. 이 시 속에서 '너'는 유산한(낙태한) 아기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누군가일 수도 있습니다. 시인이 꿈 꾸고 소망했던 이상향일 수도 있습니다. 오래 전 시라 읽는 분들의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시는 잃어버린 것에 대한 강렬한 회상과 재회의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197x년의 우리들의 사랑 - 아무도 그 시간의 火傷(화상)을 지우지 못했다

 

  몇 년 전, 제기동 거리엔 건조한 먼지들만 횡행했고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아니었다. 우리는 언제나 잠들어 있거나 취해있거나 아니면 시궁창에 빠진 해진 신발짝처럼 더러운 물결을 따라 하염없이 흘러가고 있었고 ...... 제대하여 복학한 늙은 학생들은 아무 여자하고나 장가가 버리고 사학년 계집아이들은 아무 남자하고나 약혼해 버리고 착한 아이들은 알맞는 향기를 내뿜으며 시들어 갔다.

  그해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 우리의 노쇠한 혈관을 타고 그리움의 피가 흘렀다. 그리움의 어머니는 마른 강줄기, 술과 불이 우리를 불렀다. 향유 고래 울음 소리 같은 밤 기적이 울려 퍼지고 개처럼 우리는 제기동 빈 거리를 헤맸다.  눈알을 한없이 굴리면서 꿈속에서도 행진해 나갔다. 때로 골목마다에서 진짜 개들이 기총소사하듯 짖어대곤 했다. 그러나 197x년, 우리들 꿈의 오합지졸들이 제아무리 집중 사격을 가해도 현실은 요지부동이었다. 우리의 총알은 언제나 절망만으로 만들어진 것이었으므로......

  어느덧 방학이 오고 잠이 오고 깊은 눈이 왔을 때 제기동 거리는 "미안해, 사랑해"라는 말로 진흙탕을 이루었고 우리는 장 속에서도 "사랑해, 죽여 줘"라고 잠꼬대를 했고 그때마다 마른번개 사이로 그리움의 어머니는 야윈 팔을 치켜들고 나직이 말씀하셨다. "세상의 아들아 내 손이 비었구나. 너희에게 줄 게 아무것도 없구나." 그리고 우리는 정말로 개처럼 납작하게 엎드려 고요히 침을 흘리며 죽어갔다.

 

최승자 시인의 시 '197x년의 우리들의 사랑 - 아무도 그 시간의 火傷(화상)을 지우지 못했다'는 1970년대의 시대적 배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과 방황을 담고 있습니다. 이 시는 깊은 상실감, 절망, 허무함을 그리고 있습니다. '미안해, 사랑해'와 같은 말 속에서도 진정한 사랑과 위로는 없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절망과 고통 속에서 왜곡되고 불완전하게 표현됩니다. 1970년대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 속에서 청춘들이 겪는 고통과 혼란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꿈과 이상은 억압받고,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방황합니다. 이 시는 개인적 고통과 사회적 상황이 얽혀 있는 복합적인 절망감을 담고 있으며, 그 시대의 젊은이들이 겪었던 상처와 고통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Y를 위하여

 

너는 날 버렸지,

이젠 헤어지자고

너는 날 버렸지,

산 속에서 바닷가에서

나는 날 버렸지.

 

수술대 위에 다리를 벌리고 누웠을 때

시멘트 지붕을 뚫고 하늘이 보이고

날아가는 새들의 폐벽에 가득찬 공기도 보였어.

 

하나 둘 셋 넷 다섯도 못 넘기고

지붕도 하늘도 새도 보이잖고

그러나 난 죽으면서 보았어.

나와 내 아이가 이 도시의 시궁창 속으로 시궁창 속으로

세월의 자궁 속으로 한없이 흘러가던 것을.

그때부터야.

나는 이 지상에 한 무덤으로 누워 하늘을 바라고

나의 아이는 하늘을 날아다닌다.

올챙이꼬리 같은 지느러미를 달고.

  나쁜 놈, 난 널 죽여 버리고 말 거야

  널 내 속에서 다시 낳고야 말 거야

내 아이는 드센 바람에 불려 지상에 떨어지면

내 무덤 속에서 몇 달간 따스하게 지내다

또다시 떠나가지 저 차가운 하늘 바다로,

올챙이꼬리 같은 지느러미를 달고,

오 개새끼

못 잊어!

 

최승자 시인의 시 'Y에게'는 상실, 고통, 분노, 그리고 복수의 감정을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화자는 '너'에게 버림받았고, 그 상처는 깊습니다. 이는 단순한 관계의 끝을 넘어서, 화자가 자기 자신까지도 버리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이어집니다. 화자는 '너'에게 복수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냅니다. 또한, 아이를 다시 낳고, 아이가 하늘과 바다를 떠돌며 다시 돌아오는 반복적인 생명 주기를 상상합니다. 이는 고통 속에서도 다시 태어나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을 나타냅니다. 이 시는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고통과 상실을 탐구하며, 복수와 재생을 통해 고통을 극복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성에 관하여

 

여자들은 저마다의 몸 속에 하나씩의 무덤을 갖고 있다.

죽음과 탄생이 땀 흘리는 곳,

어디로인지 떠나기 위하여 모든 인간들이 몸부림치는

영원히 눈먼 항구.

알타미라 동굴처럼 거대한 사원의 폐허처럼

굳어진 죽은 바다처럼 여자들은 누워 있다.

새들의 고향은 거기.

모래바람 부는 여자들의 내부엔

새들이 최초의 알을 까고 나온 탄생의 껍질과

죽음의 잔해가 탄피처럼 가득 쌓여 있다.

모든 것들이 태어나고 또 죽기 위해선

그 폐허의 사원과 굳어진 죽은 바다를 거쳐야만 한다.

 

최승자 시인의 시 '여성에 관하여'는 여성의 몸과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이 시는 여성의 몸을 죽음과 탄생이 교차하는 장소로 묘사하며, 여성의 존재가 지닌 복잡성과 그 안에 담긴 역사를 탐구합니다. 여성의 몸이 지닌 생명력과 그 안에 담긴 역사, 고통, 희생을 심도 있게 탐구하며, 여성의 존재가 생명과 죽음의 순환에서 차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시작

 

한 아이의 미소가 잠시

풀꽃처럼 흔들리다 머무는 곳.

꿈으로 그늘진 그러나 환한 두 뺨.

 

사랑해 사랑해 나는 네 입술을 빨고

내 등뒤로, 일시에, 휘황하게

칸나들이 피어나는 소리.

멀리서 파도치는 또 한 대양과

또 한 대륙이 태어나는 소리.

 

오늘밤 깊고 그윽한 한밤중에

꽃씨들이 너울너울 허공을 타고 내려와

온 땅에 가득 뿌려지리라.

소리 이전, 빛깔 이전, 형태 이전의

어둠의 씨앗 같은 미립자들이

내일 아침 온 대지에 맨 먼저

새순 같은 아이들의 손가락을 싹 틔우리라.

 

그리하여 이제 소리의 가장 먼 끝에서

강물은 시작되고

지금 흔들리는 이파리는

영원히 흔들린다.

 

최승자 시인의 시 '시작'은 생명의 탄생과 자연의 순환, 그리고 새로운 시작에 대한 희망과 아름다움을 노래합니다. 시는 섬세하고 생동감 넘치는 이미지들로 가득합니다. "사랑해 사랑해 나는 네 입술을 빨고"라는 구절은 사랑이 생명의 시작과 밀접하게 연결됨을 나타냅니다. 사랑은 생명의 탄생을 촉진하고, 새로운 생명을 꽃피우는 힘을 지닙니다. "내일 아침 온 대지에 맨 먼저 새순 같은 아이들의 손가락을 싹 틔우리라"는 구절은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담고 있습니다. 새로운 생명이 자라나는 모습은 밝고 희망찬 미래를 상징합니다. "강물은 시작되고 지금 흔들리는 이파리는 영원히 흔들린다"는 구절은 생명과 자연의 지속성과 영원성을 표현합니다. 이는 모든 것이 시작과 끝이 없으며,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 시집 중의 어느 시에서부턴가 내가 직업적으로 능청을 떨기 시작했다는 느낌이 든다. 그참, 벌써 능청이라니, 하고 말하면, 그것도 능청스럽게 들린다. 그렇다면 더욱 더 시적으로 능청을 떨든가 아니면 ......"

 

1979년 <문학과 지성> 가을호에 '이 시대의 사랑'외 4쳔을 발표하며 등단한 최승자 시인. 황지우, 이성복 시인과 함께 1980 ~ 90녀대를 대표하는 시인으로서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고 합니다. 작품세계가 끔찍할 정도로 어둡고, 자기 과거에 대한 노출이 적나라하다고 합니다. 비극적 사랑에 의한 슬픔 혹은 인생의 덧없음에 의한 공허감, 자기연민 등을 극한까지 밀어붙이고, 이를 자학에 가까울 정도로 찢어발기며 냉소함에도 그러한 어둠이 아주 매력적이라는 반전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1990년대 중반 신비주의 공부를 하다가 정신분열증을 앓게되면서 재발과 입, 퇴원을 반복하였다고 합니다. 23년 11월 포항 죽도성당에서 아녜스라는 세례명으로 영세식을 하였으면 성경 필사를 하며 지낸다고 합니다. 최승자 시인의 건강과 안녕, 평화롭고 평안한 일상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