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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4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 도종환, 창비시선 0501 (2024년 5월)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 깊고 고요한 밤입니다고요함이 풀벌레 울음소리를물결무늬 한가운데로 빨아들이는 밤입니다적묵의 벌판을 만나게 하여주소서안으로 흘러 들어와 고인어둠을 성찰하게 하여주소서내가 그러하듯 온전하지 못한 이들이 모여세상을 이루어 살고 있습니다어제도 비슷한 잘못을 되풀이하였습니다그러니 도덕이 단두대가 되지 않게 하소서비수를 몸 곳곳에 품고 다니는 그림자들과적개심으로 무장한 유령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관용은 조롱당하고계율은 모두를 최고 형량으로 단죄해야 한다 외치고 있습니다시대는 점점 사나워져갑니다사람들이 저마다 내면의 사나운 짐승을 꺼내어거리로 내몰고 있기 때문입니다스스로 목숨을 끊어도 면죄는 없습니다지금은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사방이 바닷속 같은 어둠입니다우리 안의 깊은 곳도환한 시간이 불빛처럼 .. 2024. 9. 8.
《사월 바다》 도종환, 창비시선 0403 (2016년 10월) 내소사 내소사 다녀왔으므로 내소사 안다고 해도 될까전나무 숲길 오래 걸었으므로삼층석탑 전신 속속들이 보았으므로백의관음보살좌상 눈부처로 있었으므로단청 지운 맨얼굴을 사랑하였으므로내소사도 나를 사랑한다고 믿어도 될까깊고 긴 숲 지나요사체 안쪽까지 드나들 수 있었으므로나는 특별히 사랑받고 있다고 믿었다그가 붉은 단풍으로 절정의 시간을 지날 때나능가산 품에 깃들여 고즈넉할 때는 나도그로 인해 깊어지고 있었으므로그의 배경이 되어주는 푸른 하늘까지다 안다고 말하곤 하였다정작 그의 적막을 모르면서종양이 자라는 것 같은 세월을 함께 보내지 않았으면서그의 오래된 내상(內傷)과 함께 있지 않았으면서그가 왜 직소폭포같은 걸 내면에 지니고 있는지그의 내면 곳곳이 왜 낭떠러지인지 알지 못하면서어찌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까그의 .. 2024. 8. 4.
《고두미 마을에서》 도종환, 창비시선 0048 (1985년 3월) 각혈 다시는 절망하지 않기 위하여마지막 약속처럼 그대를 받아들일 때채 가시지 않았던 상한 피 남아이 신새벽 아내여, 당신이 내 대신울컥울컥 쏟아내고 있구나.삶의 그 깊은 어딘가가 이렇게 헐어서당신의 높던 꿈들을 내리 흔들고아득히 가라앉는 창 밖의 하늘은강아지풀처럼 나부끼며 나부끼며 낮아져맥박 속을 흐느끼며 깊어가는구나굳어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당신의 살 속으로걸어 들어가는 이름도 알 수 없는 목숨을 따라내가 한없이 들어가고 있구나.그러나 아침 물빛 그대 이마에 손을 얹고건너야 할 저 숱한 강줄기를 바라보며아내여, 우리는 절망일 수 없구나. 접시꽃 당신은 삼십대 초반 위암으로 세상과 이별하였습니다. 도종환 시인의 시 '각혈'에서는 접시꽃 당신과 겪고 있는 고통과 절망, 그리고 그 속에서 희망과 인내를 노.. 2024. 6. 30.
《당신은 누구십니까》 도종환, 창비시선 0111 수없이 많은 얼굴 속에서 수없이 많은 얼굴 속에서 당신의 얼굴을 찾아냅니다수없이 많은 목소리 속에서 당신의 목소리를 찾아냅니다오늘도 이 거리에 물밀듯 사람들이 밀려오고 밀려가고 구름처럼 다가오고 흩어지는 세우러 속으로우리도 함께 밀려왔단 흩어져갑니다수없이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 속에서오늘도 먼 곳에 서 있는 당신의 미소를 찾아냅니다이 많은 사람들과 함께 가는 먼 길 속에서 당신은 먼발치에 있고당신의 눈동자 속에서 나 역시 작게 있지만거리를 가득가득 메운 거센 목소리와 우렁찬 손짓속으로우리도 솟아올랐단 꺼지고 사그라졌다간 일어서면서결국은 오늘도 악수 한번 없이 따로따로 흩어지지만수없이 많은 얼굴 속에서 당신의 얼굴을 기억합니다수없이 많은 눈빛 속에서 당신의 눈빛을 기억합니다. 이 시는 많은 사람들, 수많은.. 2024.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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