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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book)/민음의 시

《巨大(거대)한 뿌리》, 김수영, 민음사 오늘의 시인총서 0001 (1974년 9월)

by Sisnaajinii(씨스나지니) 2024.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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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눞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季康子 問政於孔子曰 "如殺無道, 以就有道, 如何?"  孔子對曰 "子為政, 焉用殺? 子欲善而民善矣. 君子之德風, 小人之德草. 草,上之風, 必偃." -《論語》顏淵篇19-

 

논어 안연편 19장에서는 계강자가 공자에게 "무도한 자를 죽여 도덕적 질서를 세우는 것이 좋은 정치인가" 묻습니다. 이에 공자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정치의 답이 아니며, 지도자가 선한 마음을 가지면 백성들도 자연히 선해질 것"이라 답합니다. 공자는 이 답변을 통해 덕치(德治)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지도자의 덕이 백성에게 미치는 영향을 비유로 설명합니다. "군자의 덕은 바람과 같고, 백성은 풀과 같아서 바람이 불면 풀이 쓰러진다"는 말은 지도자가 덕으로 다스릴 때, 백성들도 자연스레 그에 따르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김수영은 시 '풀'에서는 이와는 다른 시각이 바라봅니다. 그는 바람에 눕고 울지만, "늦게 눕고 먼저 일어나며, 늦게 울어도 먼저 웃는" 풀의 강인함을 노래합니다. 김수영은 바람보다도 강한 풀의 생명력을 찬미하며, 순응하지 않는 풀의 위대함을 드러냅니다. 이 두 작품은 모두 풀과 바람을 비유하지만, 공자는 덕이 미치는 영향을 말하는 반면, 김수영은 풀의 자율성과 끈기를 노래합니다. 민중의, 인민의 위대함이여.

 

 

성(性)

 

그것하고 하고 와서 첫번째로 여편네와

하던 날은 바로 그 이튿날 밤은

아니 바로 그 첫날 밤은 반 시간도 넘어 했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그년하고 하듯이 혓바닥이 떨어져나가게

물어제끼까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다부지게 해줬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이게 아무래도 내가 저의 섹스를 槪觀(개관)하고

있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똑똑히는 몰라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나는 섬찍해서 그전의 둔감한 내 자신으로

다시 돌아간다

憐憫(연민)의 순간마다 恍惚(황홀)의 순간이 아니라

속아 사는 憐憫(연민)의 순간이다

 

나는 이것이 쏟고난 뒤에도 보통때 보다

완연히 한참 더 오래 끌다가 쏟았다

한번 더 고비를 넘을 수도 있었는데 그만큼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또 속고 만다

 

"어느 겨울인가 아침 일찍 돌아온 수영에게 씻을 물을 가져다주려는데 새로 산 고급 내복이 없는 것이었다. 내가 어디에 두고 왔냐며 다그치자 그는 불같이 화를 냈다. 동대문 어느 여인숙에서 여자와 잠을 자고 왔는데 방이 하도 더러워서 나올 때 벽에 걸어둔 걸 까맣게 잊고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어떻게 그렇게 더러운 방에서 사람이 잘 수 있냐며 나에게 되묻기까지 했다. 나는 새로 내복을 사주겠노라며 아이를 어르듯 수영을 달랬다. 나는 그런 마음으로 아내로서는 민망하기 짝이 없는 이 시를 공개하기로 했다, 세상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면 어떠랴. 살아서와 마찬가지로 그의 시가 더 빛날 수 있다면 나는 어떤 수모와 치욕도 달게 받을 수 있다." - 김현경 <김수영의 여인> 에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王宮(왕궁) 대신에 王宮(왕궁)의 음탕 대신에

五十(오십)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越南(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三十(삼십)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씪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는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情緖(정서)로

가로 놓여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第十四野戰病院(제14야전병원)에 있을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絶頂(절정) 위에는 서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二十원 때문에 十원 때문에 一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一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만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만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김수영 시인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는 일상 속 작은 분노와 사회적 불의 앞에서 느끼는 자괴감과 무기력을 표현한 시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분노가 정의나 자유를 위한 투쟁이 아니라 사소한 일에만 쏠려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스스로를 "옹졸하다"고 평가합니다. 갈비가 기름 덩어리로 나왔다거나 설렁탕집 주인에게 욕을 퍼붓는 일은 큰 사회적 문제와는 무관하지만, 시인은 그런 일들에만 분개하는 자신을 자책합니다. 시인은 언론의 자유나 월남 파병 반대 같은 더 큰 문제에 맞서지 못한 자신을 비판합니다. 소설가의 투옥* 같은 사회적 이슈에 침묵하고, 일상의 사소한 일들에만 화를 내는 자신의 모습을 반성합니다. 그는 일상 속에서 마주한 경험들을 통해 더 중요한 문제 앞에서는 한 발 물러선 자신을 깨닫습니다. 병원에서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기" 같은 일들을 하며 경멸받은 기억, 어린아이의 투정에 굴복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자신이 사회적 절정에서 비켜 서 있음을 인식하고, 그로 인해 스스로를 "비겁하다"고 여깁니다.

  이 시는 일상의 작은 분노에 집착하고 더 큰 사회적 문제에 무관심한 현대인의 무력함을 비판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분노가 얼마나 사소한 것에 국한되어 있는지 자각하면서도, 큰 문제에 맞설 용기가 부족한 현실을 한탄합니다. 결국 이 시는 우리가 일상 속 사소한 문제에 얽매이지 말고, 더 중요한 사회적·정치적 문제에 관심을 갖고 행동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김수영의 시는 당시 사회적 불의에 무기력하게 반응하는 개인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그 속에서 느껴지는 인간적인 고뇌와 자책을 깊이 있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소설가의 투옥: 1965년 남정현 '분지' 필화 사건

 

 

巨大(거대)한 뿌리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

어쩌다 셋이서 술을 마신다 둘은 한 발을 무릎 위에 얹고

도사리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南쪽식으로

도사리지 않았다 그럴 때는 이 둘은 반드시

以北친구들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앉음새를 고친다

八·一五(8·15)후에 김병욱이란 詩人(시인)은 두 발을 뒤로 꼬꼬

언제나 일본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일삼았지만

그는 일본대학에 다니면서 四年(사년)동안을 제철회사에서

노동을 한 强者(강자)다

 

나는 이사벨·버드·비숍女史(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一八九三(1893)년에 조선을 방문한 英國王立地學協會會員(영국왕립지학회회원)이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世界(세계)로

화하는 劇的(극적)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남자로서 거리를 無斷通行(무단통행)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

내시, 外國人(외국인)의 종놈, 官吏(관리)들뿐이다 그리고

深夜(심야)에는 여자가 사라지고 남자가 다시 오입을 하러

闊步(활보)하고 나선다고 이런 奇異(기이)한 慣習(관습)을 가진 나라를
세계 다른 곳에서는 본 일이 없다고
天下(천하)를 호령한 閔妃(민비)는 한번도 장안 外出(외출)을 하지 못했다고……

傳統(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傳統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光化門(광화문)
네거리에서 시구문의 진창을 연상하고 寅煥(인환)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埋立(매립)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패러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버드·비숍女史(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歷史(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歷史(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追憶(추억)이 있는 한 人間(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비숍 女史(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進步主義者(진보주의자)와
社會主義者(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通一(통일)도 中立(중립)도 개좆이다
隱密(은밀)도 深奧(심오)도 學究(학구)도 體面(체면)도 因習(인습)도 治安局(치안국)으로 가라 東洋拓殖會社(동양척식회사), 日本領事館(일본영사관), 大韓民國 管理(대한민국 관리)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種苗商(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낳는 여자, 無識(무식)쟁이,
이 모든 無數(무수)한 反動(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 第三人道橋(제3인도교)의 물 속에 박은 鐵筋(철근)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怪奇映畵(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면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想像(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김수영 시인의 「거대한 뿌리」는 복잡한 감정과 시대적 모순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과거와 전통에 대한 복합적인 인식을 표현합니다. 시인은 한국의 근대사와 식민지 경험에서 비롯된 혼란스러운 정체성 문제를 다루며, 그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복잡한 내면을 드러냅니다. 이 시는 매우 역설적이고 도발적입니다. 시인은 역사의 더러운 면과 진창 같은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속에서 인간의 본질적 가치를 찾으려고 합니다. 시인은 일상 속 사소한 것들, 더럽고 낡은 전통, 사회적 모순까지 모두 받아들입니다. 대한민국의 현실조차 그에게는 '황송'하게 느껴지며, 이는 부조리한 역사 속에서도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와 사랑, 추억 같은 본질적인 가치를 발견하려는 시인의 태도를 반영합니다. 그는 진창 같은 현실 속에서도 인간은 영원하며, 그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시인은 당대의 정치적·사회적 이념을 조롱합니다. "진보주의자", "사회주의자", "통일", "중립" 같은 거대 이념을 비꼬며, 그 속에서 자신만의 "거대한 뿌리"를 찾으려 합니다. 이 "거대한 뿌리"는 외부의 이념이나 관습을 초월한, 자신의 존재와 삶의 본질을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이 시는 과거와 현재의 더럽고 복잡한 현실을 받아들이면서도 그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을 담고 있습니다. 시인의 그 현실을 거부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 속에서 인간의 영원함과 사랑, 추억을 탐구하려 합니다.

 

"성실하고 정직한 인간은 언제나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위해 싸운다. 인간의 모든 예술적 노력도 그런 싸움의 기록이다. 혼돈의 영역을 언어로써 조금씩 조금씩 인간적 질성의 영역 속에 편입시키는 작업이야말로, 정직하게 세계를 이해하고 관찰하려는 모든 의식인의 공통된 목표다." - 김현 <김수영 거대한 뿌리> 해설 '자유와 꿈 - 김수영의 시세계'에서

 

 

죄와 벌

너는 억만개의 모욕이다

김일성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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