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잡설(雜說)/소설

말하는 숲

by Sisnaajinii(씨스나지니) 2024. 5. 3.
728x90
반응형

  어제 내린 비가 성판악 등산로의 돌무더기 사이로 개울과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안개가 내린 숲, 봄 이파리들 사이로 보이는 하늘,  봄 햇살이 언 나무들을 녹이고 있었다. 

  성판악 입구에서 백여미터를 걸었을 때, 등산 복장이 아닌 여성이 보였다. 옅은 브라운 트렌치 코트와 검은 케쥬얼화를 신은 그녀의 모습이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보였다 . 걸음을 옮길 때마다  케쥬얼화 위로 하얀 발목이 살짝 드렀나다가 사라지곤 했다. 그녀의 키는 167 ~ 8 센티미터 정도, 자연스럽게 흐르는 곡선 그리고 적당한 볼륨감을 드러냈다. 목선을 따라 내려오는 부드러운 웨이브진 긴 머리카락, 그녀의 실루엣을 더욱 뚜렷하게 만들었다. 안개 속에 희미하게 비추는 그녀의 모습은 묘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녀는 봄비로 씻은 숲의 속살 냄새를 맡으며 가볍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외국에서 온 관광객인가, 이런 미끄러운 길을 어떻게 오를까, 위함할 텐데....'하고 생각했다. 그때 그녀가 '들어가지 말라'는 표지판 앞에서 멈춰 섰다. 한참을 그 표지판을 바라보며 움직임이 없었다. 그런 그녀 옆을 지나치는데,

  "저기요, 여기가 등산로인가요?"라고 그녀가 물었다.

  "네, 이쪽 길이 등산로 입니다."

  "그런데 왜 입산금지 푯말이 있죠?" 그녀의 질문에 걸음을 멈추고 나 역시 푯말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음.....아, 그 푯말은 이 숲길로 들어가지 말라는 거네요. 이쪽 길이 등산로에요. 이쪽으로 올라가면 됩니다."

  입산금지 푯말 앞에 서서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녀의 얼굴이 밝아졌다.

  "여기 길로 가면 한라산 정상까지 갈 수 있나요?" 그녀가 물었다.

  "네, 여기는 한라산 성판악 등산로입니다. 성판악에서는 한라산 정상 백록담까지 갔다 올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길로 가면 한라산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는 건가요?" 이야기를 못 들은 것은 아닐텐데 그녀가 다시 물었다.

  "......, 네, 한라산 정상 백록담까지 올라 갈 수 있어요. 백록담까지 갔다 오려면 왕복 대략 8시간은 걸린답니다. 진달래 대피소에 12시 30분까지 도착해야 백록담에 올라 갈 수 있답니다. 서둘러야 할 텐데 오늘은 힘들지 않을까요?." 

  그녀는 잠시 고객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제주도 분이 아닌신가 봐요?"

  "네, 제주도 출신은 아니죠, 일 때문에 제주도 왔지요. 오늘은 쉬는 날이라 봄비 내린  한라산을 걷고 싶어 왔습니다."

  "저는 출근길이에요. 집은 서귀포고, 회사가 제주시에 있어서요. 매일 성판악을 넘어 출근하는데, 오늘은 안개가 내린 성판악이 너무 예뻐서 10분만이라도 걸어볼까 하고요. 백록담은 가보셨어요?" 그녀가 물었다.

  "네, 몇 번 다녀왔습니다."

  "한라산 정상은 어떤가요? 저는 한 번도 가본적이 없어서요."

  "한라산 정상은 백두산 천지처럼 장엄하지는 않지만, 백록담만의 멋과 기상이 있지요." 

  그녀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렇구나, 저는 영실에서 윗세오름 대피소까지만 세 번 올라갔어요. 너무 힘들더라고요. 간신히 올라갔다 왔고, 며칠을 온 몸이 아파서 고생했어요. 오늘은 어디까지 가셔요?"

  "오늘은 사라오름 쪽으로 갈 생각이에요. 내려오는 길에 진달래 대피소에서 사발면이랑 김밥으로 간단히 점심도 먹고요."

  "가을 억새 유명한 오름이 어디더라..... 그 오름은 가봤었는데."

  "새별오름을 말하나요?"

  "새별오름은 아닌데....."

  " 가을 억새가 유명한 오름은 산굼부리, 새별오름, 따라비오름....., 여러 오름이 있긴한데..... 산굼부리는 개인 사유지라서 입장료를 받더군요."

  "저 어릴 때 산굼부리, 여미지식물원 모두 무료 였는데."

  "아 그랬군요."

  "아닌가. 그 땐 어려서 입장료를 안 받았을까요? 여하튼 15, 6년전엔 입장료를 내지 않았어요."

  그녀와 어제 내린 봄비가 만든 작은 웅덩이와 작은 개울을 따라 걸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아, 이제 저는 내려가야 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네, 조심해서 내려가셔요. 안전 운전 하시고요."

  그녀는 출근해야 한다며 올라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갔다. 그녀의 모습이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다가,   다시 성판악 돌길을 따라 한라산 향해 걸음을 옮겼다. 걷던 중 숲속에서 나는 부쓰럭 거리는 소리에 발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살폈다. 덤블 사이로 한 마리 고라니가 조심스럽게 나타났고, 그 큰 눈망이 마주쳤다. 서로를 바라보며 순간적으로 숨을 나누었다. 고라니와 헤어지고 다시 길을 재촉하다가, 연두색 이파리로 몸을 바꾼 나무 사이에서  '딱딱딱' 구멍을 뚫고있는 딱다구리를 발견했다. 안개 속으로 사라졌던 그녀가 마치 고라니였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딱다구리였나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런 상상을 하며 미소를 지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